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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boran Oct 07. 2021

<sound and scent> 칼림바

음과 향이 데려오는 그날의 일


2020년 11월, 신혼집으로 이사하면서 본가에 피아노를 놔두고 왔다. 놔둘 자리를 마련해두기는 했지만 어쩐지 잘 가지러 가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피아노를 대했던 당시 내 마음을 증명했는지도 모른다. 본가에서도 부모님이 종종 '안 칠 거면 피아노 그냥 사촌집 갔다 줄까?' 하고 물으신 적이 많은데, 나는 잘 연주하지도 않으면서 그건 싫다고 늘 대답했다. 계륵 같은 나의 취미. 피아노가 정말 치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언제든 이 집으로 가져오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성인 한 명의 무게쯤 되는 그 피아노를 신혼집으로 옮기는 데 드는 노동력을 생각해보니 나는 딱히 연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싱거운 마음이다. 다만 피아노를 가지고 올 때까지 간단하게 연주할 악기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자리를 잡고 앉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조그마한 악기. 리코더처럼 저렴하면서도 리코더만큼 시끄럽지 않은 악기. 뭐가 있을까.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작년 sns에서는 '칼림바'가 한창 유행이었다. 아프리카의 체명 악기 종류 중 하나라는 칼림바. 손톱 끝으로 톡톡 치기만 해도 오르골 소리가 나는 그 악기 소리에 나는 단숨에 반해버렸고, 정말 다양한 디자인의 칼림바를 샅샅이 다 살펴봤다. 가격대는 최저 1만 원 이하에서 6-7만 원 선도 있었다. 그중 내 마음에 들었던 칼림바는 투명 디자인의 4만 원대 브랜드 제품이었는데, 아무래도 한 두 번 만지작 거리곤 그만두지 않을까 싶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몇 번 튕기다 말 수도 있는 낯선 물건에 4만 원을 소비하자니 뭔가 애매했다. 4만 원이면 내가 좋아하는 굽네 고추 바사삭 이 두 마리고 호가든이 16캔이다. 결국, 나는 훗날의 나에게 머쓱하지 않고자 배송비를 포함해 만 원도 채 되지 않는 입문용으로 구매했다. 생각보다 꾸준히 연주한다면, 더 멋진 디자인으로 구매하리라 다짐하면서.


그만큼 비주얼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던 구매였는데, 예상외로 도착한 악기의 외관이 꽤 근사했다. 별다른 무늬 없이 깔끔하고 짙은 나뭇결 위의 건반들. 음각으로 하나하나 새겨진 코드와 숫자 덕분에 웬만해선 누구나 별 어려움 없이 딩동 거릴 수 있다. 가장 궁금했던 건 '도레미파솔라시도'의 배열이었는데, 인스타그램에서 본 여러 사람들의 연주 장면을 보면 정말 단조로운 연주임에도 멜로디를 연주하는 손 배열이 피아노 건반의 배열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악기의 도레미파솔라시도는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가 가장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도라파레도미솔시'


건반 위의 번호 12345는 각각 도레미파솔을 의미했다. 그 번호를 따라가 보니 칼림바의 음계 배열 순서는 '도라파레도미솔시' 순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요상한 배열을 가졌을까. 칼림바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 수집조차 하지 않은 상태로 연주해 본 칼림바의 건반 배열은 상당히 낯설었다. 사용설명서와 함께 몇 가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보가 함께 왔지만, 나는 보면서 연주하는 것보다 들으면서 연주하는 것을 더 편안해하는 스타일인지라 참고하지는 못했다. 대신 유튜브를 켰고, 비교적 간단해 보였던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곡을 어설프게 연습해봤다. 상당히 낯설었지만 왜 이 악기가 이런 배열을 가졌는지는 금세 짐작이 갔다. 물론 이 짐작은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열 손가락이 아닌 두 엄지로만 연주할 수 있는 체명 악기 칼림바. '도라파레도미솔시'의 배열이라면, 이 엄지 두 개 만으로도 반주와 화음이 어렵지 않을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는 듯했다. 레파라, 도미솔이 양 쪽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기본 3도 화음이 각 엄지로도 손쉽게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생각이 칼림바 건반 배열의 이유가 아니라면, 나로서는 다른 이유를 생각해내기는 어렵다.


두 엄지 끝에서 영롱한 오르골 소리가 났다. 특히 캐럴이나 지브리 음악과 정말 잘 어울렸고, 피아노의 까만 건반이 내는 소리인 반음이 없는 노래들이라면 어떤 노래든 오르골처럼 연주가 가능했다. 물론 동봉된 튜너로 건반을 톡톡 치면 원하는 반음도 무리 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지문보다는 손톱 끝에서 더욱 맑은 소리가 난다. 닿는 대로 톡톡 칠 때마다 단조롭고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반주가 없거나 부족해도, 전혀 허전하지 않은 소리였다. 칼림바의 단순하고 영롱한 소리가 부럽다. 현악기 중 기타와 비슷한 악기들에 빗대어 보자면 칼림바의 오르골 소리는 우쿨렐레와 비슷한 위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생각보다 손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은 지금 와보니 쓸모없었다. 소파 위 칼림바는 내가 팩을 할 때마다, 넷플릭스를 볼 때마다, 명상이 끝날 때마다 자꾸만 손이 간다. 리코더처럼 시끄럽지 않아서, 피아노처럼 자리를 잡고 앉지 않아도 돼서, 소리가 영롱하고 편안해서. 갖가지 이유로 나는 칼림바를 찾는다. 어느 주말, 소파 위에 퍼질러 몇 시간을 내리 누워있어도 내 두 엄지가 칼림바 위에 있다면 나는 엄마 부모님으로부터 걸려온 안부 전화에도 이렇게 답하곤 했다. 


"딸랑구 모하노?"

"딸랑구 지금 연주 중이다~"

 

그리곤 엄빠가 딱히 원치 않는 영상 통화를 굳이 걸어 칼림바 연주를 몇 곡씩 소화해낸 뒤야 전화를 끊는다. 그럴 때마다 화면 속 엄마 아빠와 남동생은 정성 없는 박수갈채를 보내준다. 박수를 치지 않으면 이 사람은 한 곡 더 연주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겠다. 

지금 쓰고 있는 칠천 원짜리 칼림바가 질릴 때쯤이면, 자신 있게 사만 이천 원짜리 투명 바디의 칼림바를 사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생산적인 시간 낭비에는 어디서든 연주 가능한 손 안의 악기가 최고임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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