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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boran Dec 11. 2022

<sound and scent> 반신욕

음과 향이 데려온 그날의 나



반신욕은 외국에서 Korean Half-bath, Lower-body bath 등으로 불린다. 왜 반신욕 앞에 'Korean'이 붙을까 궁금했는데, 외국에서는 몸을 반만 담그는 일이 다소 생소해서 반신욕의 원리와 효능에 대한 이야기와 동의보감으로부터 유래된 한국의 목욕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세계 곳곳에 알음알음 퍼지고 있더라. 반신욕의 효과가 동의보감에서부터 전해진다니, 한국인인 나조차 몰랐던 이야기라 흥미롭다.


으슬으슬 추워지는 요즘 같은 날씨에는 적어도 주에 2번 이상은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 진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일주일에 단 한번 욕조에 몸을 넣기도 귀찮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욕조를 씻고, 물을 받고, 입욕제를 푸는 일은 컨디션에 따라 나를 위한 근사한 과정이 되기도, 반대로 상당히 귀찮은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소 뜬금없지만 천연 입욕제를 구매하는 것을 추천해 본다. 천연 입욕제는 일반 제품에 비해 같은 가격 대비 양도 작고 유통기한 역시 매우 짧다. 나는 이 짧은 유통기한이 우리를 욕조에 넣어주는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비싸게 주고 샀으니, 사용 권장 시기 내에 빨리빨리 사용하고 싶어 지니까.


원래는 평소보다 훅 추워지는 겨울밤 날씨가 반갑지 않았지만, 반신욕에 습관을 들이고 난 이후부터는 뼈가 아릴듯한 추위도 딱히 무서워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 날씨에 오히려 실내 운동 대신 실외에서의 만보 걷기를 즐기기도 한다. 물론 사람들이 극찬하는 고독한 걷기와 사색은 아직 (많이) 어렵고, 걸을 때 함께할 음악이나 친구와의 통화는 필수다. 걷다 보면 몸에서 조금씩 열이 나면서 시린 바람이 조금씩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충분한 걷기로도 막지 못할 추위가 엄습할 때면 얼른 집으로 들어와 욕조 안으로 쏙 들어가면? 그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없다.


반신욕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욕조 덮개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다. 처음엔 만 원 초반대의 플라스틱 덮개를 구매해 사용했다. 돌돌 말아 접을 수 있는 접이식이라 편리했지만, 플라스틱은 물때에 굉장히 약했다. 저렴한 덮개를 깨끗하게 유지하려면 제법 깐깐한 건조과정이 필요했다. 사실 어느 재질의 덮개라도 제대로 된 건조 과정은 필수이지만, 플라스틱 제품은 유독 그 시간이 길었다. 그러다 보니 접이식을 접이식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 점 때문에 이사 시즌을 맞았을 때 자연스럽게 편백 나무로 제작된 제품으로 환승했다. 욕조 덮개는 형태나 소재에 따라 천차만별의 가격대를 가진다. 그중에서도 나는 중반대의 가격인 7만 원 대의 편백나무 접이식 덮개를 선택했는데, 구매한 지 약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편백향이 은은하게 나는 것을 보면 꽤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따듯한 전기장판 속이 절실해질 만큼 찹찹한 몸이 준비되었을 때 나는 가장 의욕 있게 반신욕을 준비한다. 욕조 전용 삼베실 수세미로 빠르게 욕조 안을 청소하고, 뜨끈한 물을 3분의 1 정도 받는다. 물이 차오르는 동안 욕조 위에 덮개를 반 정도 덮어두고, 읽을 책과 들을 노래를 고른다. 이때부터 욕실에는 기분 좋은 편백향이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가끔은 은영 언니가 선물해 준 향초를 같이 켜 두기도 한다. 하지만 화장실 내부에서 초를 켤 때는 생각보다 환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분위기 있는 반신욕'에 대한 열망이 가득할 때만 초를 켠다. 마지막으로 입욕제를 욕조 수전 바로 밑에 톡 떨어뜨리면 모든 준비는 끝이다. 미지근한 물로 간단하게 씻은 몸을 욕조에 스르륵 빠뜨린다. 꽂아둔 책갈피를 빼내고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긴다.


일전에 '실내의 백가지' 연재 소재로 '변기 위 독서'라는 주제를 선택한 적이 있다. 단언컨대, 욕조 안 독서는 변기 위 독서보다 빈도수가 적을 뿐 만족도는 그 이상이다. 내가 나를 아끼는, 몸과 마음을 채우는 기분이 충분히 들기 때문이다. 반신욕을 할 때마다 절로 궁금해지는 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어째서 따뜻한 물에 하반신만 담갔는데 상반신에 열이 확 오르는지에 대한 의문이고 (나는 문과생이다) 두 번째는 왜 그리도 안 읽어지던 책이 욕조 안에만 들어가면 술술 읽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전자는 온라인 검색 및 동의보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후자는 아무래도 휴대전화에 물 한 방울 닿기 싫어하는 나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욕조를 기준으로 멀찌감치 자리 잡은 전화기에서는 사시사철 선곡하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행위를 독서로 설정함으로써 아무 고민 없이 책 속의 글귀에 빠져들 수 있어서인지도. 평소에 내가 어떤 책에 대하여 흥미도나 퀄리티를 평가하려면 아무래도 욕조 안에서 그 책을 읽어야 그나마 가장 객관적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지금, 런던 외곽 도시인 왓포드의 한 숙소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큼지막한 크기에 멋스러운 손잡이, 그리고 안전한 바닥재질까지 마련된 최적의 욕조에서 반신욕을 즐겼다. 우리 집에는 없는 커다란 샤워 타월로 몸을 돌돌 말아 나오니, 걸어본 적도 없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 언제부턴가 여행을 가면 숙소 상태에서 욕조의 크기와 청결 상태가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예전에는 욕조의 유무조차 관심 밖이었는데, 새로 생긴 이 습관이 나의 시야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 


여담이지만, 지금 쓰고 있는 '음향의 조화'에 앞서 간간히 연재했던 '실내의 백가지'라는 주제에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아직도 이 주제가 참 막연하고 어렵다. 사람 좋아하고, 바깥 좋아하는 내가 팬데믹을 슬기롭게 이겨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정한 주제이지만, 알다시피 거리 두기는 해제되었고 실내의 소중함에 집중할 여유가 점점 더 없어졌기 때문이다. '실내'라는 부분보다 '백가지'라는 부분이 특히나 막연하게 느껴진다. 실외까지 합쳐도 나를 즐겁게 하는 행위들이 백가지나 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라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이 쉬운 듯 깐깐한 주제 덕분인지 나는 내 일상을 조금 더 미시적으로 살펴보며 소소한 행복을 느리지만 꾸준히 찾아나가고 있다. 미시적인 내가 들을 수 있는 음과 맡을 수 있는 향은 더욱 풍요로울 것이다. 내가 돌이켜낼 나 자신은 미래만큼이나 무한한 것이다. 그럴 때면 누구보다 부자가 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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