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boran Feb 10. 2023

<sound and scent> 비


비가 오면 귀신같이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이제는 조금씩 와닿는다. 아직 관절이 욱신거릴 나이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실내에서도 비 냄새를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비와 땅이 만나며 생기는 습기가 오묘한 향을 만드는 모양이다. 흙먼지 위로 축축한 이불이 덮혀진 듯, 살짝은 쿰쿰한 그 냄새가 나에게 제일 먼저 비소식을 전해준다.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어릴 적부터 비보다는 눈을 좋아라 했던 나는 비가 올 때면 그저 우산 쓰기가 귀찮다는 생각을 했다. 손이 두 개뿐인데 한 손으로 우산을 드는 것이란 얼마나 곤란한 일인가. 하지만 이제는 비 냄새를 맡자마자 번뜩 부모님 생각이 난다. 나처럼 겁이 많은 엄마의 30분 남짓한 출근길이, 그리고 먼 길을 운전해야 하는 아빠의 근무시간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엄빠 안전운전! 3시부터 6시까지 제일 많이 온다네.


엄마 아빠, 그리고 민석이와 함께하는 단톡방에 기상 예보를 알린다. 비 냄새를 맡자마자 내가 하는 일이다. 문자를 보내고 나면 머지않아 '너도 조심하라'는 엄빠의 따뜻한 답장과 '나는 왜 걱정 안 해주냐'라고 되묻는 민석이의 답장이 돌아온다. 늘 토씨하나 달라지지 않는 전개이지만, 어쩐지 뻔하면 뻔할수록 지겹지 않은 일상이다. 저녁이 되면 별 일 없이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다는 그 반복이 어째서 지겨울 수 있겠는가.


어젯밤엔 비가 정말 많이 내렸다. 예고 없이 내린 비라 패딩 모자만 쓰고 그 비를 흠뻑 다 맞아야 했다. 방전된 자동차 때문에 보험을 부른 상황이라, 다시 집에 올라가 우산을 들고 내려올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몰랐던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방전뿐만 아니라 스타트모터도 고장이 난 상태였다.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몸만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그 상황에서도 나는 아빠 생각이 먼저 나는 걸 보니 몇 년 새 효자가 된 모양이다. 나는 이렇게나 쉽게 나에게 감동하고, 나를 칭찬해 준다. 


다음 날 눈을 뜨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이 역시 기상예보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이 동네에서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는 일은 아주 귀하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으면 어디든 예뻐진다. 근데 왜 예쁠까? 흰색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눈은 왜 항상 예쁠까. 얼른 피고 얼른 져버리는 벚꽃처럼, 눈도 금세 녹아버릴 걸 알아서일까.


몇 장의 사진과 함께 또 한 번 가족 단톡방을 찾는다. 눈이 많이 내렸어요! 다들 안전운전.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당신들의 안전을 응원하는 연락을 보낸다. 운행 시간이 긴 아빠에게는 특별히 전화를 해본다. 그럼 아빠는 항상 나보다 몇 겹 쌓인 경험과 기민함으로 나를 위로해 준다.


-여기는 눈 안 온다 걱정 마라~ 눈 오길래 출근 몇 시간 앞당겼고

 아빠 퇴근할 때쯤이면 동네에도 눈 다 녹았을 거다 아마.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시마다, 도마다 날씨가 달라지는 것이 때때로 신기하면서도 감사하다. 이런 아빠의 대답을 들을 때면 꼭, 아빠가 계절을 관통하는 마법사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갈수록 더 자주, 더 많이 가족을 걱정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나도 나이를 먹긴 먹는구나' 싶다가도, 아직도 아빠가 날씨의 주술사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나는 아직 아빠의 영원한 무지렁이 딸랑구네.. 싶다.

이전 08화 <sound and scent> 수인당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