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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귄 Dec 06. 2020

Burnie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타국에서 우울증이 터졌을 때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건, 정신적으로 단단해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신체가 함께 겪어 내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고된 일이다. 이 일은 몸의 유전 정보를 통째로 바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섭취하는 음식과 물이 달라지고, 공기가 달라지고, 접촉하는 세균과 태양 빛의 세기가 모두 달라지니까 말이다. 특히 버니 Burnie 에서는 시시때때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과 구름이 잔뜩 낀 회색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은빛 햇살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곳에서 2년을 보내면서 표면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든 하고 있지 않든 새로운 땅에 적응하는 작업에 나는 무척 지쳐있었는지도 모른다.

길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찬기가 누그러진 보드랍고 눅눅한 바람이 슬금슬금 오고 있던 즈음, 이상하게도 나의 마음은 더욱 가라앉았는데, 사소한 일에도 곧잘 눈물이 났다.


어느 봄날, 스르르 눈물이 나오다가 온종일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한국에 있는 가족이 못 견딜 정도로 그리워졌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 오랫동안 쌓였는지, 격정이 풍선처럼 가슴속에서 부풀어 올라 그것을 터뜨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버렸었나보다. 그날은 터져버린 풍선이 힘없이 오그라져 땅바닥에 널브러지듯 나도 물처럼 쏟아졌다.    


 


그날 늦은 밤이 되고 남편은 결국 000(호주의 911)으로 전화를 걸어 온종일 울고 있었던 내 상황을  이야기하고 구급차를 보내 달라고 했다. 병원 측에서는 생명이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구급차는 30분이 지나서 집에 도착했다. 남자 1, 여자 1명으로 이루어진 2명의 구급요원이 나를 보러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건 건 여성 구급요원이었다. 그녀는 마른 체격에 키가 무척 컸고 금발 커트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 있던 나와 눈을 맞추기 위해 긴 다리를 쪼그려서 앉고는, 자신을 소개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말해도 괜찮다고 했다. 정신이 없었을 때라 그녀의 이름을 들었지만, 곧 잊어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감정조절이 되지 않고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고, 이곳에서 나는 사회와 단절된 것 같고, 남편 말고는 어울릴만한 사람도 아는 사람도 없고,  한국의 가족이 보고 싶어서 지금은 가슴이 너무 갑갑하다고 꺽꺽거리며 말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자기도 네덜란드에서 온 외국인이고 같은 서양 문화권에서 왔어도 이곳에서 지내는 게 쉽지 않다며 아시아 문화권에서 온 거라면 정말 힘들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같이 온 다른 남자 요원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외국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녀와 남자 구급요원은 나를 구급차로 데려가면서 빠르게 열을 재고 코로나 대응 질문들을 해나갔고 나는 눈물을 닦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한쪽으로 보내면서 느릿느릿 대답해나갔다.


그들은 남편에게 집에 남아 있는 게 좋겠다고 했다. 돌이켜 보니 아마도 그들은 내가 가정폭력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편을 집에 떼어 놓고 구급차에 타서는 집에 남편과 있는 게 안전하냐는 질문을 받았으니 말이다. 처음엔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해 하며 안전하다고 대답했는데 나중에서야 구급요원들의 조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타스매니아 북서지역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갔다. 사실 이 병원은 우리 집에서 차로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차에서 내릴 때, 나의 괜한 유난으로 다른 응급환자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닌지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다 곧 응급실로 가는 통로 유리창에 퉁퉁 부은 눈과 엉클어진 반곱슬머리를 한 여성이 반사되어 보였는데, 그건 바로 나였다. 다행히 구급차를 부를 정도의 적당히 정상이 아닌 행색으로 보여 그 와중에도 안도가 됐다.


앰뷸런스 안에서 짧은 시간 동안 네덜란드에서 온 구급요원은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이곳 버니 Burnie 에는 얼마나 있었는지, 자의로 온 게 맞는지, 직장은 있는지, 호주 내 친구는 있는지, 한국의 가족들과는 자주 연락하는지, 따로 복용하는 약이 있는지. 나는 남편을 따라 호주에 왔고, 가족과 행복해지기 위해서 왔다고, 자의로 왔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름대로 사람을 사귀기 위해 이런 저런 모임에도 나갔지만, 나는 언제나 유일한 아시아인이었고, 투명 인간처럼 소외되는 느낌이었다고, 원래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올해 초에 한국에 갔다 올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갈 수가 없다고, 호주 정부에서 나에겐 입국허가를 해주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차에서 내리기 전 이런 말을 해주었다. ‘지금은 너에게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야.’ 사실 이 말은 부드럽게 의역한 것이고 실제로 그녀가 한 말을 옮기자면 ‘You’re in a shithole now. (직역하면 똥통)’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잠깐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 대기실에서 훌쩍대고 있는 사이 구급요원들이 나를 대신해 수속해주었다. 여자 구급요원은 병원 안을 왔다 갔다 하다가, 나에게 다시 와선 이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하룻밤 자고 가고 싶으면 입원도 가능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런 다음 다음 환자를 이송하러 가기 전 다시 나에게 와서 허그해 줄까 라고 물어봐 주었다. 그녀는 정말 천사같았다.


그날 밤 하얀 벽으로 둘러 싸인 휑한 응급실 대기실에는 다리를 다친 남자 한 명이 있었을 뿐 그외엔 아무도 없었다. 환경이 완전히 바뀌어서 그랬는지 주눅이 들었는지 나의 울음은 가벼운 훌쩍임으로 수그러들었다. 곧 한 간호사가 다가와 따뜻하게 데워진 담요를 내 몸에 얹어 주었다. 호주에 와서, 그리고 버니 Burnie 에 와서 지내는 동안 아프지 말자고 긍정적인 생각만 하자고 끝없이 스스로 다독였던 나의 마음이 무색해지게, 간호사가 덮어준  따뜻한 담요의 친절이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이 도시에서 현지인에게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건 이런 종류의 친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시간 정도 뒤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흑인 간호사가 나를 보러 나왔다. 그는 아프리카 계열의 엑센트가 섞인 영어로 여자 구급요원이 이미 나에게 했던 비슷한 질문을 했다. 간호사는 이 시간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는 없다며 며칠 이내로 내가 만날 만한 사람들을 연결해주겠다고했다. 간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할 때쯤 나는 많이 진정되어 코만 훌쩍일 뿐 울고 있진 않았다. 간호사는 진정이 된 거 같다고 이제 집에 가도 좋다고 말했다.


남편이 곧 병원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집으로 오면서 오늘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저지른 일인지 아니면 나에게 일어난 일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분명한 건 나의 우울은 폭발했고, 나는 부러졌다는 것.

따져보면 병원에서 나의 비정상적인 반응에 처방을 내리거나 치료를 한 건 아니었다. 다만 병원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환기가 되었고,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말을 섞었고, 그런 일들이 다시 일상의 감각을 되돌려 준 것이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병원에서 이런 나를 돌봐준 이들은 모두 호주에 사는 외국인이었다. 타스매니아의 북서쪽 외진 시골엔 현지 전문 의료인들이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이런 전문 인력은 도시로 빠져나가기 마련이니까. 이 걸 해결하기 위해 호주 정부는 영주권을 빌미로  외국인 전문 의료인을 시골로 끌어와서  몇 년 동안 근무하는 조건을 내걸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곳의 의료 체계가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영주권을 목표로 머무는 외국인들에게 버니 Burnie 는 그리 즐겁고 편한 곳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러하듯이 그들도 그냥 이 시간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었던 구급요원 그녀는 이곳을 똥통이라고 불렀다. 서슴없이 그 말을 할 수 있게 되게까지 그녀는 여기서 어떤  일을 겪었던 걸까. 생각보다 그리움과 외로움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니 Burnie 에 머무는 다른 외국인들을 통해 이 도시의 옆얼굴, 광대뼈의 굴곡 아래로 진 그늘 같은 어두움을 보았다.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건, 고통을 전제로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진정으로 서로를 알아갈 때 진통이 있듯 장소도 그런 것 같다.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고통으로 그 길을 연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울음을 터뜨리듯이. 그리고 어쨌든 삶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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