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펭귄 Nov 01. 2020

72년 된 집에 살고 있습니다 #1

We learn the hard way.

타즈매니아의 겨울은 춥고 축축하다. 일주일의 반 이상은 흐리거나 비가 온다. 밤이 되면 온도가 내려가 풀밭 위에 서리가 내리고 낮에는 곧 녹아내려 땅은 늘 젖어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나는 추위를 대비해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남편과 내가 작년에 렌트한 집은 1948년에 지어진 주택이라서 실내온도가 실외 온도보다 낮아지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익숙한 나는 오래된 주택이 왜 이렇게 추운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나에게 집은 따뜻하고, 따뜻한 물을 걱정 없이 쓸 수 있는 포근한 장소였으니까 말이다.

주택에 살며 처음으로 맞은 겨울은 정말로 혹독하게 지나갔다.


작년 늦여름, 여기로 이사 올 때 남편과 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당시엔 집이 오래된 줄만 알았지 48년도에 지어졌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우리는 집을 보러 다닐 때부터 이 집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었다. 방 세 개짜리 집에 앞뜰과 울타리가 쳐진 뒷마당이 딸려 있었다. 어느덧 35kg가 되어버린 반려견을 데리고 사는 우리에겐 이상적인 크기의 집이었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창틀은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지붕은 슬레이트가 아니라 기와로 되어있어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고운 색이 났고 무게감이 있었다. 현관문 입구에 난 창은 프렌치 식으로 격자 창살이 달려있었는데 이 부분이 꼭‘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집 분위기가 났다. 현관을 지나면 나오는 커다란 거실에선 멀리 시원한 바다 가보였다. 수평을 뻗은 바다가 여름 내내 집을 구하기 위해 긴장을 했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혀 주는 듯했다. 렌트비는 말도 안 되게 저렴했다. 주에 260달러. 놀라운 가격이었다.


가을이 되고 새로운 환경이 가져다준 흥분감이 사라질 무렵, 나는 집에서 은은하게 곰팡내가 나는 걸 알아챘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부터 생긴 비염이 계속 심해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휴지로 하얀 산을 만들 만큼 코를 풀어야만 조금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겨울이 오니 렌트비가 왜 이렇게 쌌는지 결정적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했던 하얀 나무 창틀은 비가 오면 습기를 먹고 부풀어 올라 창문을 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환기를 시키려면 현관문을 열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집만큼 오래된 얇은 창문 유리는 실내온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언제나 하얗게 김이 서리다가 아침이 되면 결국 물이 되어 주룩주룩 흘러내렸는데, 나는 매일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수건으로 닦아내야만 했다. 며칠이라도 그 일을 쉬어버리면 어느새 까만곰팡이가 창틀을 타고 자라고 있었다. 비바람이 심하게 치는 날이면 기와지붕을 타고 실내로 가끔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방 하나에서는 계속 차갑고 무거운 나무 썩는 냄새가 천장에서 났다. 결국 남편과 나는 그 방의 문을 영영 닫아버리기로 했다. 안 쓰는 물건을 보관할까 하다가도 물건에 냄새가 밸까 걱정되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추워서 히터를 틀면 한참이 지나야 만 한기가 사라졌다. 집안 천장이 3m가 넘을 정도로 높아서 공기가 잘 데워지지 않는 탓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거인들이었던 걸까) 어디서 새어 들어오는지 모를 웃풍도 한몫했다. 그제야 나는 이전 세입자들이 여기서 얼마나 살다 갔는지 궁금해져 구글로 찾아보다 우리 집이 1948년에 지어졌다는 걸 발견했다. 한국 전쟁 이전에 지어진 집이라니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긴 했지만 말이다.


집 안에서도 나는 계속 두꺼운 패딩점퍼를 입고 있었고, 옷이 무거워 어깨가 아파지면 속에선 서러움이 끝없이 올라왔다. 기나긴 겨울밤 이불을 둘둘 싸고 누워 내가 어쩌다가 이곳까지 흘러오게 되었는지 생각하고 한탄하다가 잠이 들곤 했다. 겨울이 지나갈 즘 집으로 배달된 전기세 고지서는 나를 더욱 우울하게 했다. 석 달분이 한꺼번에 적용되긴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비싼 860달러였다. 히터를 많이 쓰긴 했지만, 따뜻하게 지냈다면 억울하진 않았을 텐데, 추위에 벌벌 떨며 겨울을 보낸 비용 치고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겨울을 보내고 해가 점점 길어질 무렵, 얼어붙은 것 같았던 몸이 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다음 해 겨울을 준비해야겠다고 정신이 들었다. 3월, 호주의 늦여름 즈음 그러니까 한국이 아직 겨울일 때 온수매트를 한국에서 주문했다. 공교롭게도 그때 코로나 사태가 터져 항공우편이 막혀 배편으로 배달받아야 했다. 두 달이 넘게 걸렸지만 그래도 겨울이 오려면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다음은 못 쓰는 천으로 두꺼운 긴 띠를 만들어 온 집안을 빙 둘러가며 바닥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 부분을 모두 감쌌다. 웃풍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전망이 그리 좋지 않은 창문에는 모두 뽁뽁이 비닐을 붙여버렸고, 창문마다 달린 커튼 안에 속 커튼을 만들어서 이중으로 바람을 막았다.


덕분에 이번 겨울은 훨씬 따뜻하게 보냈다. 비바람이 불고 추운 날 온수매트 위에서 귤을 까먹고 있으면, 한국의 온돌방에 있는 것 마냥 포근하고 행복한 느낌이 나기도 했다. 작년보다 행복한 겨울을 보내서 일까. 긍정적인 마음은 먼 훗날 집을 사기 위해 집을 보러 다니는 상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때엔 서러웠던 지난겨울의 경험을 거울삼아 단호하게 아래 조건들을 따져볼 것이다. 북향일 것, 창문은 이중 유리로 되어 있어야 할 것, 창틀은 메탈 소재로 되어 있어야 할 것, 천장은 너무 높으면 안 될 것,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은 지 10년 이상 되지 않을 것.


남편은 가끔 이렇게 이야기한다. 'We learn the hard way.' 이 말을 들으면 안 해도 될 것 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 짜증은 좀 나지만, 결국 나는 웃음이 피식 나오고 만다. 우리에게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다. 그래도 배움 없이 살아가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이전 05화 반려견을 위한 나라는 있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