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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귄 Nov 01. 2020

72년 된 집에 살고 있습니다 #2

살구의 빛과 향

우리 집의 판매 이력을 구글에서 찾아보면 1948년에 지어진 이후 처음으로 2013년에 부동산 시장에 나오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짐작해보면 집을 지은 부부가 60년 이상을 여기에서 살다가 죽고, 집을 물려받은 자녀가 이 집을 팔려고 내놓은 게 아니었을까. 사람이 살던 공간에선 분위기나 느낌 같은 것들이 남아 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순 없지만, 왠지 행복하고 안온한 삶이었을 것 같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시간과 함께 허물어져 가는 집이라 겨울을 혹독하게 보내긴 했지만, 이 집의 원주인이 뒷마당에 심어놓았던 과실나무 덕분에 여름은 넘치는 풍성함 속에서 살았다. 집과 함께 얻게 된 정원을 돌보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도시의 시멘트가 차라리 더 익숙한 나는 우왕좌왕, 법석을 떨듯 정원 일을 했고, 땅은 그런 나를 묵묵히 받아 주었다. 이런 과정 뒤에 공짜로 따먹었던 과일은 분명 돌아가신 원주인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을 거다.


작년 이사를 들어오고 찬찬히 뒷마당을 살펴보니 여기저기 손질이 많이 필요한 정원이었다. 집의 새 주인과 지난 세입자는 정원 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나무는 대부분 가지치기가 되지 않아 멋대로 자라고 있었고, 구석에 있던 고사리 나무는 주위 잡초가 너무 많이 자라서 죽어가고 있었다. 정원 가운데 있던 야채 밭도 형태만 갖추었지 흙 안은 클로버 뿌리로 가득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정원 일에 남아도는 시간과 체력을 쓰기로 했다. 온종일 정글처럼 우거진 나무 덤불에 톱질하고 밭을 갈아엎고 잡초를 뽑으며 시간을 보냈다. 야채 밭 한쪽에 퇴비 통을 마련하고 지렁이를 사다가 쏟아부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고 퇴비 통 뚜껑을 열 때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지렁이가 보여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다행히 얼마 후 별로 놀라지 않게 되었다. 어느 정도 야채 밭이 정리되고 7월이 되었다. 김치를 만들어보고 싶어 시험 삼아 배추 모종을 여러 개 사다가 심었는데 해가 짧고 추워서인지 잘 자라지 못했다. 배추가 맛있는 걸 눈치챈 민달팽이들이 미친 듯이 이파리를 뜯어먹어서 아기 배추들을 누더기로 만들어 버렸다. 9월에 봄이 왔건만, 배추는 다가올 죽음을 직감했는지 갑자기 키를 무럭무럭 키우더니 유채꽃 같은 노란 꽃을 야채 밭 가득 피워냈다. 자식들이라도 보고 죽으려 한 것이다. 예쁜 배추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벌들은 붕붕거리면서 꿀을 빨러 모여들었다.


12월이 되고 날씨가 서서히 따뜻해졌다. 정원 앞뒤로 예쁘게 깔려 있던 잔디는 최소 한 달에 2번 깎아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단정하게 빛나던 잔디는 금방금방 수북하게 자라 버렸고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잡초도 끝도 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땅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땅을 책임지게 된다는 것, 나무와 풀을 돌본다는 것은 감격스러우면서도 고된 작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절망뿐이었던 배추밭을 갈아엎고 여름작물을 야심 차게 준비했다. 파슬리, 고수, 토마토, 오이 모종을 심고 호박씨와 고추씨 몇 개도 뿌려 놓았다. 해가 길어지고 날씨도 점점 더워지며 공기는 바싹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해가 어스름해지면 스프링클러로 야채 밭을 적셔주었다. 노을을 보며 스프링클러가 착착착착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하루를 보냈든지 그냥 기분이 좋았다.


잡초의 성질을 가진 파슬리는 곧 무성해졌고 요리에 곁들일 때마다 싱그러운 녹색과 짜릿한 향으로 맛을 더해 주었다. 토마토는 쉴 새 없이 빨갛게 익어가 따기에 바빴다. 호박은 경계를 모르고 땅을 정복하고 있었다. 마법 같은 여름은 날마다 고조되었다. 뒷마당 울타리 가에 있던 나무에서는 놀랍게도 과일이 열리기 시작했다.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사과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고 자두나무는 무려 세 그루가 있었다. 이름조차 궁금하지 않았던 평범한 나무인 줄 알았건만, 열매를 보고서 어떤 나무인지 정확히 알게 되니, 가까이 있던 보물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한낮에 기온이 꽤 올라 나는 정원 일에 손을 놓고 하릴없이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2월 말 즈음 새들이 말랑해진 과일을 파먹으려고 날마다 몰려왔다. 과일이 다 익은 모양이었다. 남편과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과일을 따러 뒷마당으로 나갔다. 모든 과일에 감사했지만, 살구는 정말 놀라웠다. 이때까지 살구는 내게 그저 그런 과일이었는데, 이 살구를 맛보고 나니 이제부터 영원히 특별한 과일이 될 것만 같았다. 태양을 빨아들인 듯 노랗게 빛나던 과육은 입안에서 달콤하고 우아한 향기를 뿜어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맛이었다. 땅과 하늘 그리고 시간이 엮이면 이런 기적을 만들어 내는 걸까. 아름다운 것들은 사람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타즈매니아에서 보낸 지난 시간은 낯설고 외로웠다. 지금 나의 계절이 어디까지가 과정이고 어떻게 엮어지고 있는지 알 순 없지만, 살구나무가 생산한 이 결과물은 나에게 희망을 주는 전달하는 것만 같았다.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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