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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귄 Oct 29. 2020

상어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

2020 7, 호주는 멜버른에서 급속도로 퍼진 당혹스러운 코로나바이러스 소식으로 온 나라에 위기감이 가득 차 있었지만, 내가 사는 호주의 또 다른 섬 타즈매니아는 본토와 이어진 바닷길, 하늘길을 막아버리고 어느 정도 평화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7 17일 저녁쯤 핸드폰으로 코로나 관련 뉴스 제목을 하릴없이 읽어 내려가다 잠시 눈이 멈췄다. ‘낚싯배에 있던 10세 아이, 상어에게 잡혀가다’ 다소 무서운 제목이었다. 기사를 열어보니 내가 사는 곳과 그리 멀리 않은 스탠리(Stanley)라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기사에 의하면 바닷속에 있던 상어가 수면 위로 갑자기 튀어 올라 배에서 아빠와 함께 물고기 손질을 하고 있던 10세 남자아이를 낚아채 물속으로 끌고 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어 상어를 따라가 입에 물려 있던 아이를 가까스로 빼내 왔다. 아이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계속 입원 중이라고 했다. 아이를 잡아채 갔던 상어는 3~5미터의 백상아리로 추정된다고 했다.


스탠리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제주도의 성산 일출봉같이 거대하고 평평한 분화구가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가 촬영되기도 했는데, 나는 그 영화를 무척 재미있게 보았기에 언젠가 저곳을 꼭 방문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입버릇처럼 남편에게‘스탠리 가기 참 좋은 날씨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일까.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미 개인적인 기대를 안겨준 장소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니 더욱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 남자아이는 차가운 바다 밑에서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을까. 아이의 아버지는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반응할 수 있었을까. 남자아이는 트라우마가 생기진 않을까. 가족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감정이 이입되어 두근거리며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중 글이 다소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느껴졌다. 목격자의 말이 실린 부분이었는데 그 사람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무시무시한 사건이에요. 가족들에겐 더 그렇겠죠. 하지만 상황은 더 나쁠 수도 있었어요. (운이 좋은 편이니) 복권을 사보세요.’ 어이없는 농담이었다. 다른 말도 있었다. ‘그 아이는 자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겼네요.’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나로선 이런 말을 남기는 사람도 그 말을 실은 기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 때가 있는 호주의 방식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닐 텐데, 이걸 낯설게 느끼는 건 내가 이방인이기 때문일까. 한국에서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면 목격자들은 어떤 말을 했을까.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상어에게 피해를 본 가족에게 복권을 사라는 말을 할 사람은 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


어디까지가 적정선인 걸까? 나로서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말도 여기서는 충분히 용납된다. 반대로 나에겐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 여기에서는 다소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거다. 이곳 행동 양식의 적절함. 나는 아직 문화 차이의 경계가 어디인지 모호하다. 호주인인 남편은 타즈매니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남편에게 기사를 보여주며 과연 이 농담이 적절한 건지 재미로 물어보았는데, 남편의 견해는 의외로 단순했다. ‘여기가 시골이라서 그래. 도시 사람이라면 달랐을 수도 있지.’ 꽤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어느 나라건 도시나 시골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매우 다르니 단순히 한국과 호주의 문화 차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사는 상어 전문가의 말로 마무리되었다. 백상아리는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관찰할 수 있는 종이고, 배 위에서 물고기 내장을 손질하고 있었던 사람의 행동이 먹이를 찾고 있는 상어를 자극했을 거라고 했다. 상어는 그저 자연적인 본능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이다. 기사 중간은 이상하게 흘러갔지만, 마무리는 꽤 괜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공격한 상어도 공격받은 인간도 함께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관점이 사실 인상적이었다. 아시아에서 큰 물고기는 먹을거리로 대상화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기사에 ‘잡으러 가자’라는 댓글이 많이 올라왔을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증오를 남기지 않은 마무리라 흥미로웠다. 타국에서 적응하느라 이렇게 저렇게 방황하고 있지만, 이런 관점은 내가 호주에 있기에 경험할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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