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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귄 Apr 11. 2021

여름밤,크리스마스

별을 만나다

부드러운 바람으로 내 안의 우울을 더욱더 부각해주었던 봄은 남반구로 비치는 낮의 길이를 길어지게 하더니 이윽고 여름으로 강렬하게 변신했다.

호주의 여름 하이라이트는 단연 크리스마스다. 한국의 크리스마스와는 조금 결이 다른 호주의 크리스마스는 추석이나 설날처럼 가족이 모이는 큰 행사다. 게다가 크리스마스가 시작하는 주부터 새해까지 이어지는 긴 연휴는 휴가를 중요시하는 호주인에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축제와 같은 시간이다. 거기에 발맞추어 크고 작은 상점들은 11월부터 크리스마스 상품을 쏟아내고 연중 제일 큰 폭의 세일을 하니 온 나라의 분위기는 들썩인다.

늘 똑같은 모습을 한 우리 작은 시골 동네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집집마다 창고에 있던 크리스마스트리를 거실로 꺼내고 집 밖에도 전구와 크리스마스 장식물을 단다. 물론 이런 장식에 신경을 쓰지 않는 집도 많지만, 일단 장식을 하기 시작한 집은 극단적이게 느껴질 만큼 꾸민 집도 많다. 이때는 장식물을 구경하며 하는 산책이 참 재미있다. 바닷가 근처에 있는 어떤 집은 거의 집 크기에 달하는 상어를 타고 있는 거대한 산타 풍선 모형을 앞마당에 전시해 놓거나, 어떤 집은 창문마다 종이에 인쇄된 촌스럽고 고전적인 분위기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한 산타의 얼굴만 커다랗게 붙여 놓거나(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 뭐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포클레인을 타고 있는 산타, 산타 모자를 쓴 플라멩고, 거대한 루돌프를 놔둔 집들도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런 풍선 장식들은 흔들거려서 왠지 모를 흥이 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23일 즘 되면 크리스마스 장식 분위기는 고조되어, 색전구로 집 안팎을 꾸미는 프로젝트를 알차고 야심 차게 준비한 사람들은 1년에 한 번 있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밤이 되면 요란한 점등식을 한다. 그때엔 나나 남편 같이 구경하기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차를 타고 동네를 돌며 그들의 화려한 장식을 구경하러 돌아다닌다. (나는 이 행위를 Christmas Night Crawling이라고 부른다.)  

그에 비해 우리 집의 크리스마스 장식은 소박한 수준이다. 늘 그렇듯 나는 장롱 속에 있던 길이 30cm 정도의 미니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남편도 어느새 촌스러운 크리스마스 틴슬을 새로 한 줄 사서 장식 선반에 둘둘 둘러놓는다. 다른 집에 비해 너무나도 짧은 작은 크리스마스 색 전구 줄을 길에서 제일 눈에 띄는 우리 집 창문 한쪽에 투명 테이프로 고정하고 작게나마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일조하기 위해 밤마다 켜 놓는다.

남편과 나는 매년 12월이 되면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상 모든 종류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집에 틀어 놓는다. 며칠은 꽤 기분이 들뜨지만, 곧 그 소리에 질리고 지쳐버려 크리스마스 날이 다가와 캐럴을 더 듣게 되지 않는 날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든다. 나름 우리만의 전통이다.


작년은 우울증 때문에 주위의 북적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 속에서도 혼자 가라앉은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날 밤에 평소에 마시지 않던 와인이나 실컷 마셔야겠다는 울적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빨리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기를 바랐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 남편과 나는 캐럴을 들으며 차를 타고 동네 사람들의 장식물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한편에 자리 잡은 착잡한 기분과는 별개로 어둠을 밝히는 각양각색의 크리스마스 전구 장식은 낭만적이고 애잔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네를 다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가 돌아가던 중 어떤 한 집이 눈에 띄었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층 집이었는데 얼마나 전구로 장식을 많이 해 놓았는지 온 집이 황금색으로 빛이 났다. “저기는 가봐야겠는데!” 남편과 나는 길을 돌려 어두운 길을 헤매며 빛을 따라 황금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저곳에서 이 집을 보기 위해 몰려든 차들로 집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꽉 차 있었다. 자세히 보니 U자 형태로 이루어진 진입로라서 차들이 줄을 지어 집 앞까지 갔다가 뒷 차에 방해를 주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 우리도 얼른 줄을 섰다. 남편과 나는 마치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거처럼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궁금해하며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황금 집 앞에는 30대로 보이는 엄마와 12살 즈음으로 보이는 딸이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초콜릿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게 되자 순간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고 남편과 내가 차문을 내리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자 마르고 단단한 체형의 엄마가 용수철처럼 우리 쪽으로 튀어나와 웃는 얼굴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화답했다. 뒤따라 딸이 앞으로 나와 바구니에서 캔디 캐인 몇 개, 킷캣과 개구리 모양의 초콜릿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손을 뻗으며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눈이 향했는데 어둠 속 찬란한 전구 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절반이 일그러진 형태였다. 남편과 나는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천천히 황금 집의 진입로를 빠져나왔고 뒤로는 여전히 많은 차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나는 그녀의 얼굴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진 않았다. 대신에 엄마와 딸이 소모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거대한 장식을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했는지, 왜 그런 계획을 세운 건지, 사람들을 모으고 집 구경을 하러 온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했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답에 대해 생각을 했다. 헤아릴 수 없겠지만 확실한 건 그들은 당당하고 용감하게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지 결정을 했고, 초콜릿과 함께 그 마음 한 조각을 나누어 주었다.

그날 밤, 밤하늘에 떠 있던 별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자아의 감옥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었고, 와인을 마시고 취해버리려는 계획을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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