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사랑에 관한 영화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말하라고 하면, 적잖은 사람이 <화양연화>를 들지 싶다. 나도 그렇다. 흔히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영화를 사랑과 이별에 관한 탐구로 소개하는데, ‘이별’은 빠져야 한다. 이별이 대체로 사랑의 중단 혹은 종료를 뜻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관점에 따라 이별은 사랑의 구성요소이거나 사랑의 연장이다. <화양연화>는 ‘대체로’가 아니라 ‘꼭 그렇지만은 않은’ 영화에 속한다. 오히려 이별로 사랑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드문 예에 속한다고 해야겠다.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2위
<화양연화(花樣年華, 영어제목 In The Mood For Love)>는 기를 쓰고 악평하려고 시도해도 악평이 불가능한 영화이다. 2000년 개봉한 이 영화의 명성은 단적으로 2016년 BBC가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2위’로 선정한 것에서 확인된다. 참고로 1위는 데이빗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였다. 해외 언론의 <화양연화> 평 중에서 뉴욕타임스의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영화”라는 평이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다. 사랑을 서정시의 형식으로 보여준다면, 그중 영화라는 영상언어로 표현할 거의 최대치를 <화양연화>가 구현했다.
시작게 한 계기가 시작을 막았다
세상살이에서 종종 목격하는 게 어떤 일의 원인이 된 무엇인가가 정작 그 일의 진척을 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이다.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된다”고 말하는 차우(양조위). 차우와 첸 부인(장만옥)은 모두 배우자가 있는 유부남ㆍ유부녀. 유부녀ㆍ유부남 사이 보통의 사랑은 사랑에 빠진 그들이 결혼상태에도 ‘불구하고’ 시작을 결행하지만, <화양연화> 속의 사랑은 두 사람이 유부남ㆍ유부녀이기 때문에, 또 각자의 배우자 간의 ‘불륜’이 두 사람을 연결한 계기였기 때문에 오직 결혼상태를 통해서만 시작이 가능했다.
물론 ‘통해서만’의 사랑 또한 ‘불구하고’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불구하고’에 주어지는 월경(越境)이 ‘통해서만’에서는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란 뜻을 갖지만, 극중에서 울려 퍼지는 같은 제목의 노래는 가족과 가정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상치(相馳)가 일어난다. 두 사람을 사랑으로 인도한 이가 하필 그들 각자의 배우자였다는 아이러니가 두 사람 사랑의 진척을 끝까지 막는다.
왕가위의 다른 영화에서 양조위가 내뱉은 “내게도 해피엔딩이 있을 뻔했죠”란 대사는 <화양연화>의 총평 같다.
엇갈림
<화양연화>의 영상은 뉴욕타임스 평대로 “숨 막힐 정도”다. 하나하나의 화면이 다 아름다운 시어(詩語)처럼 말을 하는데, 문자언어라면 절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감성을 시작부터 끝까지 누출한다. <화양연화>의 영상만으로도 상당한 분량의 분석이 가능할 텐데, 색과 조도, 선이 주인공들의 심리를 적절하게 표현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선(線)만 잠깐 언급하면, 두 사람 사이에 자주 금이 그어져 있고, 각자 홀로 화면에 잡힐 때도 빈번하게 분할하는 선 안에 위치한다. 유효하게 쓰이는 거울 또한 남녀의 사랑과 갈등, 그리고 각자 내면의 분열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분열과 엇갈림은 이사하는 초반 장면에 이미 암시된다. 같은 날 집을 얻고 같은 날 이사하는 바람에 이삿짐을 나르는 과정에 혼선이 빚어진다. 설렘, 두근거림, 망설임의 연장 속에서 둘은 끝내 주어진 선을 넘지 못한다. 맥락상 운명적 사랑이라고 불러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들은 운명을 회피하는 선택을 결심한다. 엇갈림이 그들의 사랑을 지배하기에, 어쩌면 엇갈림을 수용하는 것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길일지 모르겠다는 역설이 가능할 법도 하다.
엇갈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
슬픈 사랑을 그렸다. 본원적 엇갈림을 깔고 시작한 사랑에서 두 사람은 통념상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그럼에도 누구나 동의하듯 두 사람의 사랑이 빛을 잃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사랑이 실패했다는 말은 애초에 틀린 말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란 말 자체에 사랑의 성취가 내포된다. 사랑은 실패하지 않는다. 사람이 실패할 뿐이다. <화양연화>의 두 사람이 실패했을까.
왕가위 감독의 카메라 앵글은 실패한 사랑을 배척한다. 주인공 남녀만 영상에 나올 뿐 남녀의 배우자는 목소리나 뒷모습 정도로만 그려진다. 왕가위 감독이 묘사한 영화 속 사랑의 세계는 두 사람으로 구성된다. 사랑을 개념화하면 <연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전적인 상호대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서로의 시야에 한 사람만이 존재하는 상황을 왕가위는 영화에 설정했다. 그것이 전적인 상호대상화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영화가 묘사한 것과 같은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 되는 힘을 얻는다.
소녀 제인 마치 대 여인 장만옥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떠난 둘의 방에서 장만옥이 홀로 앉아 아무 말 없이 울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 장면은 영화 <연인>에서 제인 마치가 프랑스로 가기 전에 양가휘와 함께 지내던 방에 들른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방에서 화초에 물을 주는 소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한참 시간이 지나 프랑스로 가는 대양 한가운데서 사랑 때문에 울게 된다. 그러나 그 오열은 원작 소설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말했듯 사실 “사랑을 사랑한” 사랑의 상실에 비롯한 것이다. <화양연화> 장만옥의 사랑은 사람을 사랑했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사랑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차이를 보인다. 더구나 장만옥은 소리 내어 울지 못한다.
굳이 구분하여 장만옥이 사람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울었다고 얘기하고자 한다면, 소리 내어 울지 못할 사랑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야한 장면 하나 없는 <화양연화>가 감성으로는 19금 혹은 29금 39금 등급 이상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그 나이를 넘어야 이해할 만한 서정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는 15세 이상 관람가이다. <연인>에서 제인 마치가 연기한 소녀의 나이가 15살반이었다.
1960년대 홍콩 여인의 삶
영화의 시대배경은 1960년대이다. <화양연화>에서 장만옥과 양조위의 극중 호칭은 ‘첸 부인’과 ‘차우’이다. 남자만 이름이 있고 여자는 누구의 부인으로 호명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올라가는 “여자가 수줍게 고개를 숙였고 남자의 용기 부족에 떠났다”는 첫 자막과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가 설정한 시대를 기준으론 장만옥이 아마 (사랑에) 낼 만큼 용기를 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이름을 걸고 나오는 남자 배역이다. 남자 또한 가부장제와 가족제도에 포획된 모습을 보인다. 두 사람 사이에 (아마도?) 한 번의 정사가 일어나는 밤, 택시 안에서 여자의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다. 여자가 남자를 찾아갈 때도 카메라는 장만옥 손가락의 결혼반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같은 행태에 남녀에게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가부장제의 짙은 그늘이 나타난다. ‘불구하고’를 기준으로는 여자가 훨씬 더 (사랑에) 용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자가 바보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화양연화>는 바보 같은 사랑을 한 남자와 용감한 사랑을 한 여자가 나오는 영화다.
공간은 수미상관으로 제시된다. 마지막 엇갈림과 함께 등장하는 여자의 아이는 정황상 그리고 이웃집 남자의 전언에 의지하면 아마 그 남자의 아이일 테지만 모호하게 처리된다. 그 아이가 그 남자의 아이이든 남편의 아이이든 모두 특정한 담화를 상상할 수 있다. 다만 공간과 남자의 아이가 사랑의 현현 또는 대체물이 된 상황은 마찬가지로 가부장제 문법과 닿아있다.
선물과 사랑
선물에 관한 자크 데리다의 성찰을 인용하면, 선물이란 것이 불가능하지만 불가능한 것으로의 선물은 사유하고 의도할 수 있다. ‘선물의 불가능성(L'impossibilité du don)’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선물(Le don comme l'impossible)’을 추구하는 태도가 참된 관계의 속성이라고 한다면 사랑 또한 선물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화양연화>의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불가능성 전제되었지만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사랑을 불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맹목(盲目)하려는 가능성의 기도(企圖)가 사유된다. 맹목의 기도 아래에서 사랑이 불가능성의 자장에서 벗어난 듯이 보인다고 하여 그것이 가능성의 궤도에 접어들었다고는 확언할 수 없다. 원초적으로 사랑이 불가능하지만, 불가능한 것으로의 사랑을 지향하는 어리석은 짓까지 불가능하지는 않다. 데리다의 지적대로, 어쩌면 사랑을 사유할 수는 있지 않을까. 혹은 사랑은 사유만 할 수 있다. 삶의 불가능한 선물을 함께 사유하는 것이 사랑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왕가위 식 ‘사유’라고 해도 좋겠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선물로 주어지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막차가 떠난 다음에 도착한 시골버스정류장의 풍경 같은 것일까. 거기서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황동규) 사랑이라는 선물에 대해선 우리에게 거부할 권리, 더 정확하게는 능력이 없다는 자각이 사랑이 지나간 뒤에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