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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Oct 27. 2024

‘최악의 인간’이 오럴섹스에서 주체를 발견하는 로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10년 동안 본 영화 중 최고였다. 완전한 걸작”(리차드 커티스 감독), “이 세상 최고의 영화”(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라는 극찬을 받은 영화는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이다. 나 또한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인용한 감독들만큼 열광하지는 않았다. “요아킴 트리에는 로맨틱 코미디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는 미국 ABC뉴스의 평가가 개인적으로는 무난하게 받아들일 만한 수준인 듯하다.     


로맨스 영화 혹은 성장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두고 언론이나 평단에서 흔히 로맨틱 코미디란 용어를 쓴다. 29살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가 <사랑의 탐구>와 마찬가지로 두 남자와 사랑하는 이야기가 핵심 얼개를 이루니 그렇게 볼 수 있겠다. 한데 어쩐지 코미디 같지 않다. 곳곳에 발랄하고 감각적인 유머가 배치되어서 그렇게 보는 듯한데, 관점에 따라 유머가 유머가 아니라 성찰이라고 할 때 이 영화를 코미디로 보는 것에 반대하고 싶다. 그렇다면 꼭 코미디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고 정색하고 묻는다면 자신이 없다. ‘성찰’이란 것이 유머를 배제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요점은 로맨틱 코미디란 선입견을 품고 보아서는 안 되는 영화라는 이야기이다. 로맨스 영화의 가장 현대적인 클래식 정도로 절충하는 방법이 나쁘지는 않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이 있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두고 로맨스 영화와 성장 영화 중에서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성장 영화 쪽을 선택한다. 물론 율리에란 자의식이 강한 여성이 사랑하며 성장하는 영화이긴 하지만, 사랑을 통한 성장이란 도식이 어쩐지 스테레오타입 같아서 살짝 못마땅하다. 


애초에 로맨스 유의 영화를 싫어하는 관객 중에서 이 영화를 로맨스라는 자각 없이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무게 중심이 사랑이 아닌 쪽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의학을 공부하던 율리에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 의학 공부를 때려치운다. 갈아탄 심리학 쪽 공부에도 곧 싫증을 내고 사진을 찍으며 서점 점원으로 살아간다. 자신이 욕망하고 있는 것, 그것도 강렬하게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채 욕망한다. 일종의 아노미 상태? 어쩌면 질풍노도가 율리에의 상태를 더 정확하게 표현한 말일 수도 있다.


본래의 질풍노도는 낭만주의, 그것도 고전주의에 반대한 낭만주의의 특별한 현상이지만 아노미와 달리 개인을 대상으로 한 용어이어서 율리에의 상태를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하다. 하지만 극중 율리에의 전체 몸짓을 해명하는 데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아노미와 질풍노도를 결합한 21세기 버전 ‘주체의 혼란’ 정도면 어떨까. 앞에서 살펴본 <졸업>의 주인공이 생각나기도 한다.


사랑이란 게 본질적으로 상대가 중심축이어서 특별히 주체 자체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반응이 핵심이다. 율리에에게는 흔히 하는 말로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의 탐색이 더 핵심이다. 그에게 사랑은 예쁜 포장지 같다. 너무 예뻐서 뜯기를 주저하지만 종국에 내용물에 잊히는 부수적 사물. 


내용물은 무엇일까.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라는 율리에의 대사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내 삶의 주연이 되는 것’이 주인공이 찾아 헤매는 내용이다.      

내 삶의 주연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율리에 역으로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레나테 레인스베가 표현한 극중 캐릭터는 사랑보다는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여기서 ‘내 삶’과 ‘주연’은 논리상 별개의 사안일 수 있지만 의미상 하나로 통합된다.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은” 상황을 벗어나 주연 역할을 하려면, 먼저 주연 역할을 할 ‘내 삶’을 찾아야 하고, 그 삶 안에서 조연이 아니라 주연을 맡아야 하지만 ‘내 삶’이란 ‘내’ 안에 ‘주연’까지 포함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기에 애써 구분할 필요는 없겠다.


북유럽의 성의식을 보여주는 곳이 12장으로 구성된 영화의 제3장 #미투 시대 속 오럴섹스(ORAL SEX IN THE AGE OF #METOO)인데, 주인공의 ‘내 삶의 주연 역할’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시사를 준다. 율리에는 오럴섹스(여기선 펠라치오)에서 확고한 남성성과 대면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확고한 남성성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글을 쓰고 그 글을 대중에게 공개한다. 확고한 남성성을 보조하는 것보다 남성성이 확고해지도록 주도하는 게 ‘내 삶의 주연’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는지 궁금하다. 페미니스트가 오럴섹스를 대하는 미묘한 심리적 상충도 언급한다. 


이 글을 시간차를 두고 각각 읽은 두 애인이 모두 감탄하고 율리에의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동의를 구하는 장면에 어색해할 한국 관객이 있을 법하다는 추정과 별개로, 섹스라는 삶의 분연한 현장에서 주연을 욕망한 율리에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설정이라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하지만 이 설정이 각본을 요아킴 트리에와 에스킬 포그트라는 두 남자가 맡은 탓에 과격을 빗나간 화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화자를 생각하면 섹스에서 확고한 여성성의 문제가 더 대두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남성 필자가 이 문제를 더 끌고 가는 데엔 한계가 있을 듯하여 여기서 중단. 


극중 율리에의 주요한 두 애인 중 첫 번째 남자인 악셀(안데스 다니엘슨 리)이 매력적인 연기를 펼친다. 극중에서 “내 삶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것 같아”라며 율리에가, 만류하는 악섹을 떠나지만 ‘결과적으로’ 악셀이 율리에 삶의 디딤돌이 되는 전개가 율리에 삶의 주연화 내용에 포함된다. 악셀을 디딤돌로 주연화가 이루어지는 모습 또한 정색하고 토론할 일이지, 성(性)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삶의 디딤돌로 보아 지나가야 하는지 헷갈린다.


아무튼 로맨스 영화라기보다는 성장 영화의 성격이 강하다는 얘기다. 사랑과 성은 성장하는 데 거쳐야 할 관문일 따름이다. 제목이 여성의 성장을 확고히 보여준다는 판단이 가능해 보이나, 한국어 제목이 감미롭게 달라져 원제의 뉘앙스가 사라졌다.   


한국어 영화제목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원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이다. ‘최악의 인간’은 자신에 대한 율리에의 평가이다. 한국어 영화 제목은 성장보다는 로맨스 쪽에 초점을 맞추었다. 직역에 비해 더 부드럽고 마케팅에 도움이 될 것처럼 느껴지는 작명이다.


해피엔딩이다. ‘최악의 인간’이란 자학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찾아가는 듯한 장면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자아탐색과 함께 모성, 가족 등 홀로 선 어른이 되기까지 정립해야 할 삶의 주제가 로맨스 속에 섞여서 제시된다. ‘담배연기 키스’라는 애매한 유형의 바람피우기, 율리에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만나는 동안 세상을 멈추게 한, 자칫 촌스러웠을 위험을 넘어선 판타지 장면 등 연출 감각이 돋보인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에 와닿게 사랑을 표현한 곳을 들라면 세상을 멈춘 이 장면이다. 


사랑에 빠지면 실제로 세상이 멈추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회전목마처럼 세상이 곧 돌기 시작하고 우리는 어느덧 사랑에서 빠져나온다. 세상이 멈추는 찰나의 불가사의 때문에 세상을 버리기도 하는 게 사랑이어서 사랑이 세상에서 근절되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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