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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Oct 27. 2024

반전의 대미에서 공포분자가 흘리는 세계의 눈물

<공포분자>



<공포분자>는 대만 ‘뉴 웨이브’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이다. 극영화를 다큐멘터리 정신에 접목한 ‘뉴 웨이브’라는 대만 영화의 새로운 시도는 수십 년 전 관객과 평단 등 영화계의 박수를 받았다. 이러한 일종의 ‘성찰적 리얼리즘’의 전통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더 박수를 받기는 힘들어 보인다. 영화를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대중은 성찰을 전면에 내세운 대중예술에 불편해한다. 지금 영화에서 소비와 성찰은 병립하기 힘든 두 개 단어이다.


<공포분자>는 ‘뉴 웨이브’의 기수 고(故) 에드워드 양 감독이 1986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그의 초기작에 해당한다.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자 그의 마지막 작품인 <하나 그리고 둘>(2000년)은 ‘성찰’ 자체를 보여준 그의 영화연출의 백미이다. 그럼에도 <하나 그리고 둘>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처럼 대중적 열광을 불러올 작품은 아니다. 3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을 잔잔하고 강한 성찰로 채우니 소수의 매니아층만 열광한다. <공포분자>는 마찬가지로 성찰을 담았지만 생각보다 재미있는 작품일 수 있다. <공포분자>의 성찰은 전면적인 형식이 아니라 사건을 보여주면서 성찰을 후면에 배치하였기에 대중이 다가가기 더 쉬워 보인다.     


뉴 웨이브     


1947년생인 에드워드 양 감독은 대만 ‘뉴 웨이브’ 영화의 기수였다. 2007년에 작고했다. ‘뉴 웨이브’ 영화 <공포분자>가 보여주듯 영화를 통한 의미화와 성찰은 분명 영화예술의 지평을 확장한 뜻깊은 시도였다. 영화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 건조한 생활소음을 그대로 배경에 깔아 지치고 고립된 현대인의 삶을 냉정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명암을 조절하여 심리와 분위기를 전달하는 영화적 능력은 탁월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작품에서 목격되는 독특한 영상언어나 영화적 미감은 예컨대 르몽드 같은 데서 그를 왜 “현대 영화계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하게 만든다.


불행히도 ‘뉴 웨이브’가 더는 통용되지 않는듯하다. ‘올드 웨이브’가 되어 관객에게서 외면받았다. 성찰하지 않는 관객을 욕할 수는 없기에 재미있는 성찰이 되지 못한 영화는 어떤 ‘웨이브’든 어떤 성찰이든 현대 영화에서 살아남기 힘든 실정이다. 그렇다 하여도, 영화사적 의의와 무관하게 앞으로 <공포분자>가 영화 작품으로 계속해서 영화의 고전으로 호명되지 않을 수는 없어 보인다.


에드워드 양의 작품으로는 제53회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하나 그리고 둘>을 비롯하여, ‘타이페이 3부작’으로 불리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ㆍ<타이페이 스토리>ㆍ<공포분자> 등이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타이페이 스토리>는 이미 국내에 개봉됐지만 <공포분자>는 발표 34년 만인 2020년 스크린을 통해 국내 관객을 처음으로 만났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관객이 나의 영화를 볼 때 마치 시를 읽듯 영화를 읽어주길 바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공포분자>는 그의 말대로 감상해야 하는 영화이다.     


고독과 고립내면과 외면의 황량함     


영화는 도시의 새벽 공기를 가르는 경찰차의 질주와 경찰차에서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로 시작한다. 화면의 느낌은 불안하고 냉랭하다. 바깥 풍경은 곧 방안 풍경으로 바뀐다. 첫 장면에서 여자가 책을 읽는다. 밤을 새운 듯하다. 남자가 몇 마디 중얼거리며 여자에게 말을 건다. 화면의 중앙을 책 읽는 여자가 채우고 우하 쪽으로 자는 둥 마는 둥 한 남자가 누워 있다. 책 읽는 여자의 화면 구석에 살짝 걸친 채인 남자는 이어 팔 부근만을 보여주며 화면 밖으로 나간다.


같이 있지만 공존하는 느낌이 들지 않고 고독한 두 사람이 풍기는 각각 고립된 분위기는 영화 내내 전개된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이 마주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드물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장면 또한 드물고, 카메라는 한 사람만을 잡는다. 쌍방향 소통이 일어나지 않고 거의 일방의 진술이 화면을 채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영화 주인공 남녀의 등장 또한 같은 방식이다. 여자를 따로 보여주고 따로 남자를 보여주고, 카메라 앵글은 한집에 사는 두 사람을 잡지만 둘이 분리된 공간에 위치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극중 주울분이 남편 이립중을 떠나는 장면에서 보여준 고립과 단절의 극단적 카메라워크는 에드워드 양이 이 영화에서 전하는 공포의 실체인 듯하다. ‘공포분자’가 공포를 만든다기보다 공포가 공포분자를 만들어낸다. 즉 공포는, 공존하는 듯하지만 고립하고 단절한 사람들이 만들어낸다. 


관객은 누가 공포분자인지 찾으려 들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대미에서 마음이 흔들릴지 모르겠지만, 관객은 아마 이립중을 공포분자로 지목할 확률이 높지 않을까. 사실 누가 봐도 이립중은 저열하고 지질한 인간이다. 

억지로 같이 사는 남편 이립중에게서 아내 주울분이 느낀 감정은 혐오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와 소통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사람은 혐오의 감정과 함께 공포의 감정을 야기한다. 이립중은 아내 주울분을 너무 사랑한다. 그런 이립중이 아내에게 공포분자가 되는 현실은 확실히 고전적인 비극에 가깝다. 아리스토렐레스의 <시학>에서 거론된 공포와 연민 중에서 에드워드 양 감독이 공포라는 용어에 집중했다면, 그 공포는 상대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하지만 그 혐오가 나에게도 존재한다는 암묵적 지각을 영화로 전달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는 극중 이립중이란 특별히 혐오스러운 한 인물에게서 발산한다기보다는 이립중과 다른 척하지만 이립중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단절하고 차단하면서 공포를 생성하고, 이 공포가 사람들을 서로에게 공포분자가 되도록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스스로 공포분자가 되기도 하다. 영어 제목이 ‘The Terrorizers’로 복수로 된 것에 주목하면 좋겠다.      


가장 존엄한 인간은 누구인가     


<공포분자>에는 글이 뜻대로 써지지 않아 슬럼프에 빠진 아내 소설가 주울분, 비열한 수단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더 나은 삶과 승진을 위해 애쓰는 남편 의사 이립중이 등장한다. 취미로 동네방네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는 부잣집 소년, 그가 얼떨결에 사진을 찍으며 좋아하게 된 신비로운 분위기의 혼혈 소녀를 더해 네 사람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주울분ㆍ이립중 말고는 연결되지 않은 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며 소녀의 장난 전화를 계기로 서로 엮여 마침내 비극적 결말에 도달한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한 <공포분자>에는 호감가는 인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중 최고 비호감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이립중이겠다. 이립중이야말로 단연 ‘The Terrorizer’의 대표격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최악의 ‘공포분자’이지만 홀로 최종적 비극을 자처한 이립중이란 혐오스러운 인물 말고는 이 영화에서 그나마 존엄한 인간을 찾을 수 없다는 역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역설을 어찌해야 할까. 


연민 없는 공포가 만연한 세상에서 어떠한 카타르시스의 전망도 부재할 할 때 혐오스러운 삶과 자신의 인생을 예민하게 자각하고 세상과 최종적 단절을 결단한 이립중이야말로 가장 존엄한 방식으로 삶을 대면한 사람이란 판단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당연히 영화적 판단이다. 삶을 버렸을 때만 존엄한 삶이 가능하다는 비극적 성찰은 마지막 장면과 반전의 대미를 통해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상상의 보복에서 이립중이 거울 속의 주울분에게 총을 발사한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에는 거울 장면이 가끔 등장하는데, 거울이 분열과 성찰이란 이중의 의미를 담겠지만 총격 장면으로 보아 분열의 의미가 더 두드러지는 듯하다. 성찰에 실패하면 자아는 결국 분열한다. 충격적인 대미에서 벽에 묻은 뇌 조각과 쿨럭하고 머리 뒤쪽으로 터져 나온 핏물은 세계의 현상이자 비상구 없이 막다른 골목으로 쫓긴 인간이 흘리는 세계의 눈물이다. 


영화라는 상상 속에서 다시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고 혼용한 마지막 장면은 또 하나의 마지막 물음표를 찍으며 끝난다. 이립중의 ‘최종적 해법’ 이후 주울분이 잠에서 벌떡 깨어나 무엇인가를 하는 장면이다. 그것이 전반적 삶에 대한 구역질인지, 주울분ㆍ이립중 부부가 그동안 실패한 임신의 징표인 입덧인지는 불확실하고, 해석은 전적으로 관객에게 맡겨진다. 만일 후자를 상상하는 관객이라면 이어질 복잡한 상념을 추가로 떠올리게 되겠다.  


고립과 분열, 구원부재를 보여주는 또 다른 상징적인 장면은 비극적 사건의 방아쇠를 당긴 혼혈 소녀의 사진이다. 부분 사진을 모자이크처럼 모아 벽에 붙인 그의 대형 얼굴 사진은 창밖에서 안으로 바람이 불어오자 코와 입 등이 따로따로 펄럭인다. 일그러지고 조각난 채 펄럭이는 인간. 실존이 그렇게 닳아 없어지며 우리가 삶을 살아내는 것일 텐데, 실존을 구할 최종적 해법으로 가장 먼저 사랑을 떠올리고 마는 것이 어쩌면 공포의 실체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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