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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Apr 21. 2021

주저앉고 싶은 순간들에도 무릎에 힘을 주었던 건

퇴사 2일 전의 기록

오늘은 차은우의 생일이고, 이기광의 생일이고, 박ㄱㅇ의 생일이다. 앞의 두 명은 불철주야 대한민국의 가요 산업 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아이돌 산업 역군들이고 마지막 한 명은 불철주야 … 아무튼 불철주야 일하고 있는 내 동료의 이름이다.


퇴사까지 2일이 남았다. 기분이 좀 이상하다. 익숙한 이름의 사람들과 일하는 것은 가끔 아주 힘든 일이었지만 대부분은 좋은 일이었다. 특히 내가 어떤 프로젝트에서 도움이 되고 있다는 자기 성취감은 이 회사에서 내가 어제, 오늘하면서도 계속 다닐 수 있었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이제서야 겨우 엔지니어링들과 익숙해지고 있는데 이렇게 떠나는게 좀 아쉽기는 하지만, 이미 내린 선택에는 마음을 붙잡고 있다.


오늘은 너무 일어나기가 싫었다. 어제 늦게 잠들어서도 있었겠지만 퇴사를 앞두고 내가 굳이 회사에 가야 하나~ 하는 안일한 마음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알러지 핑계를 대고(마침 미세먼지와 꽃가루가 모두의 코털을 괴롭히던 계절이었으므로) 10시쯤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쓱하게 사무실에 들어와서는 콧물을 좀 더 과장되게 훌찌럭거렸다.


나는 고객 DB를 완성하는 최고 짜치는 일을 하면서 퇴사 시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아무도 하고 싶지 않아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마지막 진심이라는 느낌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퇴사하는 마당에 굳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튼 나는 그게 편해서 그렇다. 그런데 고객 DB를 업데이트할 수 있는 근간 자료에 업로드되어있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나는 함께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자 담당자인 L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이쯤에서 독자 여러분께, L은 내가 좋아하며 유일하게 퇴사일에 나를 울린 사람이라는 배경 지식을 이렇게 어색하게라도 전달한다. 그래야 나의 감정 변화가 좀 더 편안히 다가올 것이다.)


“L님, 여기 정보가 없어요. 확인 부탁드려요.”

3분 뒤, 다시 메신저가 왔다.

“있는데요??”


다시 시트를 확인해보니, 진짜 있었다.


음 그럴리가. 아니, 그랬던 건가? 나는 잠시 혼란에 빠져 이마 위로 물음표를 다섯 개 정도 띄웠다.


그리고 구글 스프레드시트의 수정 기록을 확인하자 1분 전에 L이 이 정보를 올렸다는 타임스탬프가 나왔다. 그러니까 이건 방금 집어넣은 정보였다. 나는 킥킥 웃으면서 다시 메신저를 보냈다.


“수정 기록이 없었다면 저는 제 정신 상태를 의심했을 거에요.. 구글아 고마워”

L이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는 상태가 표시되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연님이 수정 히스토리를 볼 줄 알아서 싫다,,”


그 메세지를 보면서 조금 킥킥대다가, 허무맹랑하고 귀여운 거짓말을 치는 L을 보면서 나는 좀 갑작스럽게 괜히 마음이 슬퍼졌다.


풀타임 전환을 고민하며 마셨던 선릉역 치킨집의 생맥주, 싱가폴에서의 뷰가 좋은 호텔, 국기원 근처의 어린이도서관 벤치, 강남역의 양대창집 같은 곳들이 스쳤다. 일의 경험들은 포트폴리오로 예쁜 이야기들만 골라 담아 묶어두었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날들은 이렇게 글이든 사진이든 어디에 묶어두지 않으면 서서히 바래질 걸 알고 있다.



긴 날들은 어떤 방향성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가며 보냈다면, 주저앉고 싶은 순간들에 무릎에 힘을 넣어 주었던 건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퇴사 메일의 정석 같은 이야기를 그림자 뒤편으로 조금 미루어두더라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진심이며 그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도 알찬 동그라미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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