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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워십의 경지, 그림자 리더

3. 팔로워의 품격

by 유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나는 사람

삼성전자의 한 연구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박 부장이 팀장으로 승진한 후 첫 번째 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하지만 박 부장은 기술 출신이 아니어서 세부적인 기술 이슈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최 선임연구원이 나섰다.

최 선임은 공식적으로는 박 부장 밑에서 일하는 팀원이었지만, 실제로는 박 부장이 성공적으로 팀을 이끌 수 있도록 뒤에서 모든 것을 지원했다. 기술적 이슈는 미리 정리해서 브리핑하고, 팀원들의 애로사항은 먼저 파악해서 해결책을 제시했으며, 외부 협력업체와의 조율도 선제적으로 처리했다.

6개월 후 프로젝트가 대성공을 거두었을 때, 모든 공로는 박 부장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팀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진짜 리더는 최 선임이었다는 것을. 그는 타이틀 없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그림자 리더'였다.

직급과 리더십의 착각

많은 사람들이 리더십을 직급이나 권한과 동일시한다. 팀장이 되어야 리더가 되고, 부장이 되어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리더십은 포지션이 아니라 영향력에서 나온다.

조직에서 실제로 일이 돌아가는 것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공식적인 리더와 실질적인 리더가 다른 경우가 많다. 공식적인 리더는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인 리더는 팀의 방향을 제시하고 구성원들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림자 리더는 바로 이런 실질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타이틀은 없지만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 공식적인 권한은 없지만 모든 사람이 의지하는 존재, 그들이야말로 팔로워십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그림자 리더의 특징과 역할

그림자 리더는 여러 가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빛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좋다면 상사나 동료의 이름으로 제안하고,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사람의 공로로 돌린다. 하지만 이는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팀 전체의 성공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둘째, 그들은 공식적인 권한 없이도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는 강제력이 아니라 신뢰와 전문성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영향력이다. 팀원들은 그들의 조언을 듣고, 그들의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셋째, 그들은 위와 아래를 모두 관리할 줄 안다. 상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후배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멘토링하며, 동료들과는 협력적 관계를 유지한다. 이는 공식적인 조직도와는 다른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림자 리더가 되는 방법

그림자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신뢰를 쌓아야 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역량을 유지하고,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트렌드와 기술을 먼저 파악해서 팀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사람들 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한다. 부서 간 소통이 막혔을 때 중간에서 조율하고, 갈등이 생겼을 때 중재자 역할을 하며, 정보가 원활히 흐를 수 있도록 허브 역할을 한다. 이는 공식적인 직책과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맡게 되는 역할이다.

세 번째로는 문제 해결의 최전선에 서야 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나서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다른 사람들이 포기하고 싶어 할 때 희망을 제시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애플의 스콧 포스탈

스티브 잡스 시절 애플에서 iOS 개발을 이끌었던 스콧 포스탈은 전형적인 그림자 리더였다. 공식적으로는 잡스 밑에서 일하는 부사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애플의 모바일 전략을 좌우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포스탈은 잡스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해서 구현할 뿐만 아니라, 잡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혁신적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멀티터치 인터페이스부터 앱스토어 생태계까지, 아이폰을 성공으로 이끈 핵심 기술들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잡스가 비전을 제시하고 팀이 하나 되어 일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했다.

팀 내에서도 그는 공식적인 권한보다는 전문성과 신뢰를 바탕으로 리더십을 발휘했다. 개발자들은 그의 기술적 판단을 신뢰했고, 디자이너들은 그의 미적 감각을 인정했으며, 마케터들은 그의 시장 통찰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림자 리더십의 실천 전략

그림자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보이지 않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회의록 정리, 자료 준비, 일정 조율 같은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맡아서 처리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축적되면서 팀 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둘째, 정보의 허브 역할을 해야 한다. 다양한 부서와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수집하고, 이를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시기에 제공한다. 정보는 힘이고, 정보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영향력을 갖게 된다.

셋째, 멘토링과 코칭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후배들의 성장을 돕고, 동료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때로는 상사의 어려움도 함께 해결해나간다. 이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전략적 투자다. 사람들이 성장하면 팀이 강해지고, 팀이 강해지면 개인도 함께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갈등이 생겼을 때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도 그림자 리더의 중요한 역할이다. 부서 간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팀원들 사이에 오해가 생겼을 때,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 소통 문제가 있을 때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공식적인 중재자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조율자로서의 역할이다.

다섯째, 혁신과 변화를 이끄는 역할도 해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기존의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며, 더 나은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팀 전체의 성과로 만들어가는 것이 그림자 리더의 특징이다.

그림자 리더십의 함정과 주의사항

그림자 리더십에도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장 큰 위험은 자신의 기여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항상 뒤에서 지원하고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해주다 보면, 정작 자신의 성과는 묻혀버릴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순간에는 자신의 기여도 어필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과도한 책임감으로 인해 번아웃에 빠질 위험도 있다. 모든 것을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지 말고, 적절히 역할을 분담하고 다른 사람들도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그림자 리더십이 공식적인 리더십의 대체재가 아니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그림자 리더로서의 경험과 역량은 결국 공식적인 리더가 되었을 때 더 큰 빛을 발하게 된다.

실천을 위한 체크포인트

스스로 그림자 리더가 되고 있는지 점검해보자. 팀에서 보이지 않는 일들을 자발적으로 맡아서 하고 있는지,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있는지, 동료들의 성장을 돕고 있는지, 갈등 상황에서 중재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또한 자신의 아이디어나 제안이 받아들여졌을 때, 그 공로를 혼자 가져가려 하지 않고 팀 전체의 성과로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중요한 지표다. 위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있는지,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이끌어가고 있는지도 확인해보자.

진정한 영향력은 직책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림자 리더십은 팔로워십의 최고 형태다. 타이틀이나 권한 없이도 조직에 진정한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을 움직이며,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쌓인 리더십 역량은 나중에 공식적인 리더가 되었을 때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진정한 리더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탄생의 순간은 바로 타이틀 없이도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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