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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면 따를까

2. 왕관을 쓰지 않는 왕

by 유키

2022년 여름,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강남역 일대가 물에 잠기면서 출근길 직장인들의 발이 묶였다.

스타트업 W사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도 마찬가지였다. 무릎까지 차오른 빗물 앞에서 직원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정장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물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사람. 바로 W사의 CEO 장현준 대표였다.

"다들 괜찮아요? 제가 먼저 길을 확인해볼게요."

장 대표는 물 속을 헤치며 안전한 경로를 찾기 시작했다. 맨홀 뚜껑이 열려 있지는 않은지, 물살이 센 곳은 없는지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직원들을 한 명씩 안전하게 인도했다.

"사장님, 옷이... 구두가 다 망가지겠어요."

"괜찮아요. 우리 다 같이 무사히 들어가는 게 중요하죠."

진흙물에 구두와 정장이 엉망이 됐지만, 장 대표는 마지막 직원이 건물에 들어갈 때까지 물 속에 서 있었다.

이 장면은 한 직원이 찍은 동영상으로 SNS에 올라가 화제가 됐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W사 직원들의 반응이었다.

"우리 대표님은 늘 그래요.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함께 가자'예요. 그래서 우리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함께 해결하려고 해요."

21세기 리더십의 모습이 아닐까. 앞에서 명령하는 리더가 아닌, 함께 걷는 리더. 높은 곳에서 지시하는 리더가 아닌,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하는 리더.


리더십 패러다임의 대전환

20세기의 리더십은 '영웅적 리더' 모델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한 사람이 비전을 제시하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조직을 이끄는 방식이었다. 스티브 잡스, 잭 웰치, 이병철 회장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리더십이 효과적이었던 시대가 분명 있었다. 산업화 시대, 빠른 성장이 필요했던 시기에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다. "까라면 까"는 문화가 오히려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는 다르다. 지식 경제 시대, 창의성이 핵심 경쟁력이 된 시대에는 명령과 통제가 아닌 협력과 공감이 필요하다.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커진 환경에서는 한 사람의 영웅이 모든 답을 가질 수 없다.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들이 달라졌다. MZ세대는 단순히 지시받고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왜'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하고, 일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수직적 관계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원하고, 명령보다는 설득을 기대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새로운 리더십 모델이 등장했다. 바로 '동행 리더십(Accompanying Leadership)'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기적: 사티아 나델라의 동행 리더십

2014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위기에 빠져 있었다. 한때 IT 업계의 절대 강자였던 이 회사는 구글과 애플에 밀려 '늙은 공룡' 취급을 받고 있었다. 주가는 정체됐고, 혁신은 멈췄으며, 직원들의 사기는 바닥이었다.

이때 CEO로 임명된 사람이 사티아 나델라였다. 인도 출신의 엔지니어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22년간 일한 내부 인사였다. 많은 사람들은 외부 영입을 기대했지만, 이사회는 나델라를 선택했다.

나델라가 CEO가 되고 처음 한 일은 놀라웠다. 전 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저는 모든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답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미래는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임 CEO 스티브 발머의 스타일과는 완전히 달랐다. 발머는 무대 위에서 열정적으로 소리치며 "개발자! 개발자! 개발자!"를 외치던 사람이었다. 카리스마 넘치지만 권위적이었고, 자신의 비전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반면 나델라는 조용했다. 그는 듣는 것부터 시작했다. CEO 취임 후 첫 6개월 동안 그가 가장 많이 한 일은 직원들과의 만남이었다. 계급장을 떼고 현장을 방문했고, 편하게 대화했다.

"What do you think?(어떻게 생각하세요?)"

회의에서든, 현장 방문에서든, 그는 항상 물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들었다. 한 엔지니어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발머 시절에는 CEO가 무서웠어요. 회의실에 들어오면 긴장했죠. 틀린 말 하면 큰일 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나델라는 달랐어요. '당신이 CEO라면 어떻게 하겠어요?'라고 묻는데, 진짜로 제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어요."

나델라의 동행 리더십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매주 금요일 직원들과의 점심

나델라는 매주 금요일 무작위로 선정된 직원들과 점심을 먹었다. 임원 전용 식당이 아닌 일반 구내식당에서, 계급장 없이 만났다.

"처음엔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CEO랑 마주 앉아서 밥을 먹는다니... 그런데 나델라가 먼저 농담을 하고, 가족 얘기를 하면서 편하게 해주더라고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요즘 무슨 프로젝트 하세요? 어려운 점은 없어요?'라고 묻는데, 정말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었어요."

실패한 팀과의 특별한 시간

더 인상적인 것은 실패한 프로젝트 팀을 대하는 태도였다. 윈도우 폰이 실패했을 때, 발머였다면 책임자를 문책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델라는 달랐다.

"실패한 팀 전체와 미팅을 했어요. 그런데 첫마디가 '수고하셨습니다'였어요.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배웠나요?'라고 물었죠. 질책이 아니라 함께 분석하고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나도 몰라"의 용기

나델라는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 기술 미팅에서 젊은 엔지니어가 복잡한 기술적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좋은 질문인데,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네요. 당신이 더 전문가인 것 같은데, 설명해줄 수 있나요?"

이것은 혁명적이었다. CEO가 모른다고 인정하다니.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신뢰를 만들었다.

함께 만든 미션

가장 큰 변화는 회사의 미션을 재정립하는 과정이었다. 나델라는 위에서 일방적으로 새로운 미션을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전 직원이 참여하는 프로세스를 만들었다.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무엇인가?"

수천 명의 직원이 의견을 냈고, 수십 번의 워크숍이 열렸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Empower every person and organization on the planet to achieve more(지구상의 모든 개인과 조직이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자)"라는 미션이었다.

직원들이 직접 참여해 만든 미션이었기에, 모두가 진심으로 믿고 따랐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나델라가 CEO가 된 후 7년 만에,

시가총액 5000억 달러에서 2조 달러로 (4배 성장)

클라우드 사업 업계 2위로 도약

직원 만족도 역대 최고 기록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 상위권 진입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문화였다. 경쟁과 정치가 난무하던 조직이 협력과 신뢰의 조직으로 바뀌었다. "Know it all(모든 것을 아는)" 문화에서 "Learn it all(모든 것을 배우는)" 문화로 전환됐다.

한 10년 차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같은 회사인데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됐어요. 예전에는 출근이 괴로웠는데, 지금은 기대돼요. 내 의견이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걸 아니까요. CEO가 우리와 함께 간다는 걸 매일 느끼니까요."


동행 리더십의 심리학적 기반

왜 '함께 가자'가 '나를 따르라'보다 효과적일까? 심리학은 명확한 답을 제시한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인간은 세 가지 기본 욕구를 가진다: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

"나를 따르라"는 자율성을 침해한다.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함께 가자"는 자율성을 존중한다. 함께 방향을 정하고, 함께 결정하기 때문이다.

한 심리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명령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함께 결정한 것은 기꺼이 실행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결정'이기도 하니까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MIT 연구에 따르면, 가장 똑똑한 개인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집단이 더 나은 결정을 내린다. 단, 조건이 있다.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참여할 때다.

"나를 따르라" 리더십에서는 리더 한 사람의 지능에 의존한다. 아무리 똑똑해도 한계가 있다. 반면 "함께 가자" 리더십에서는 모든 구성원의 지혜를 활용한다.

구글의 한 연구는 이를 증명했다. 최고의 성과를 내는 팀의 공통점은 IQ가 높은 리더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구성원이 비슷한 양의 발언을 하는 팀이었다. 즉, 함께 가는 팀이 가장 멀리 갔다.


심리적 주인의식(Psychological Ownership)

사람들은 자신이 참여해서 만든 것에 더 큰 애착을 느낀다. 이케아 효과(IKEA Effect)가 대표적이다. 직접 조립한 가구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현상이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주어진 목표보다 함께 만든 목표에 더 헌신한다. "우리가 정했으니 우리가 해내자"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신뢰의 상호성(Reciprocal Trust)

신뢰는 일방적이지 않다. 리더가 먼저 구성원을 신뢰할 때, 구성원도 리더를 신뢰한다.

"함께 가자"는 구성원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다. '당신들도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신뢰를 받은 구성원은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한다.


현대자동차 정의선 회장: 현장 속으로 들어간 리더

한국 기업에서도 동행 리더십의 모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대표적이다.

정 회장은 '양복 입은 현장 직원'으로 불린다. 그가 현장을 방문할 때는 특별한 의전이 없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직원들과 함께 일한다.

2021년 울산공장 방문 때의 일화다. 한 작업자가 조립 라인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부품의 각도 때문에 체결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정 회장은 직접 나섰다.

"제가 한번 해볼게요."

회장이 직접 공구를 들고 작업을 시도했다. 역시 쉽지 않았다. 땀을 흘리며 몇 번을 시도한 끝에 성공했다.

"정말 힘드네요. 이걸 하루에 수백 번씩 하시는군요. 개선이 필요합니다."

그 자리에서 엔지니어들을 불러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작업자의 의견을 가장 먼저 들었다.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요? 매일 하시는 분이 가장 잘 아실 텐데."

한 달 후, 개선된 공정이 도입됐다. 작업 시간은 30% 단축됐고, 작업자의 피로도는 크게 줄었다.

이런 일화는 빠르게 전파됐다. 한 현장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 회장님들은 시찰 오시면 멀리서 보고 가셨어요. 우리는 그냥 배경이었죠. 그런데 정 회장님은 달라요. 직접 해보시고, 우리 의견을 물어보세요. '현장의 목소리가 곧 답'이라고 하시면서요."

정 회장의 동행 리더십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함께하는 위기 극복

반도체 부족으로 생산에 차질이 생겼을 때, 정 회장은 비상대책본부를 현장에 설치했다. 그리고 직접 상주하며 직원들과 함께 해결책을 찾았다.

"위기일수록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제가 서울 사무실에 앉아서 보고받는 것보다,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고민하는 게 빠릅니다."

새벽까지 이어진 회의, 직원들과 함께한 김밥 도시락, 성공했을 때의 하이파이브. 이 모든 것이 '함께'였다.


노동조합과의 새로운 관계

역대 회장들과 달리, 정 회장은 노조 지도부와 정기적으로 만난다. 그것도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편한 자리에서.

"노조도 회사의 동반자입니다. 함께 가야 할 사람들이죠. 대립하면 모두가 손해입니다."

2023년 임금 협상은 역대 최단 기간에 타결됐다. 노조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정 회장이 직접 현장 어려움을 아시니까 대화가 됩니다. '함께 회사를 키우자'는 말이 진심으로 느껴져요."


실패 프로젝트 팀과의 만남

수소차 개발 초기, 한 프로젝트가 실패했다. 수십억 원이 날아갔다. 팀원들은 문책을 각오했다. 하지만 정 회장의 반응은 달랐다.

"고생하셨습니다. 실패했지만 많이 배웠을 겁니다. 그 경험이 우리의 자산입니다."

그리고 팀 전체와 저녁을 먹으며 실패 원인을 함께 분석했다. 질책이 아닌 학습의 시간이었다.

"다음에는 성공합시다. 제가 어떻게 도우면 될까요?"

이 팀은 2년 후 수소 상용차 개발에 성공했다. 팀장은 말한다.

"실패했을 때 회장님이 함께해주신 게 큰 힘이 됐어요. '우리를 믿는구나' 싶었죠.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정 회장의 리더십이 만든 변화는 숫자로도 나타난다.

2023년 글로벌 판매 730만 대 (역대 최고)

전기차 시장 점유율 세계 3위

직원 만족도 30% 상승

노사 분규 제로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문화의 변화다. 수직적이던 조직이 수평적으로 바뀌고 있다. 지시와 보고의 문화가 소통과 협력의 문화로 전환되고 있다.



동행 리더십의 실천 원칙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동행 리더십을 실천할 수 있을까? 성공 사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원칙들이 있다.


1. 물리적 동행: 같은 공간에 있기

가장 기본은 물리적으로 함께하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배달의민족 김봉진 의장은 임원실을 없앴다. 대신 직원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따로 떨어져 있으면 현장 분위기를 모릅니다. 직원들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팀 분위기가 어떤지, 옆에 있어야 알 수 있어요."

처음에는 직원들이 불편해했다. 의장이 옆에 있으니 긴장됐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러워졌다.

"이제는 김 의장님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해요. 궁금한 거 있으면 바로 물어보고, 의장님도 우리한테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진짜 동료 같아요."


2. 정서적 동행: 공감과 이해

물리적으로 함께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서적으로도 연결되어야 한다.

토스 이승건 대표는 직원 개인의 상황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님 아버지 수술은 잘 되셨어요?" "△△님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했다고 들었는데, 적응은 잘하고 있나요?"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다. 진심으로 기억하고 걱정한다. 한 직원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입원했을 때, 이 대표는 직접 병원을 찾았다.

"그냥 오셨어요. 과일 바구니 들고.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아버지 간병에 집중하세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감동했습니다."

이런 정서적 동행은 강한 유대감을 만든다. 직원들은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


3. 인지적 동행: 함께 고민하기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지적 동행이다. 함께 생각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결정하는 것이다.

네이버 한성숙 대표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독특한 방식을 사용한다. '집단 지성 세션'이다.

"저 혼자 결정하면 빠르겠죠. 하지만 틀릴 가능성도 큽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보면 더 나은 답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서비스 런칭을 결정할 때:

관련 부서 직원들이 모두 모인다 (직급 무관)

각자의 관점에서 장단점을 분석한다

브레인스토밍으로 대안을 찾는다

함께 최종 결정을 내린다

"시간은 좀 걸려도 결과는 훨씬 좋아요. 무엇보다 모두가 '우리가 결정했다'고 느끼니까 실행력이 다릅니다."



동행 리더십의 오해와 진실

하지만 동행 리더십에 대한 오해도 많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오해 1: "결정력이 없어 보인다"

일부에서는 동행 리더십을 우유부단함으로 오해한다. 모두의 의견을 듣느라 결정을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동행 리더십은 결정 과정에 많은 사람을 참여시킬 뿐, 최종 결정의 책임은 리더가 진다.

쿠팡 김범석 대표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모두의 의견을 듣습니다. 하지만 결정은 제가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의 책임도 제가 집니다. 다만 결정의 이유를 투명하게 공유하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합니다."


오해 2: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비판도 있다.

맞는 말이다. 초기 의사결정 시간은 더 걸린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시간이 단축된다.

한 컨설팅 회사의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독단적 결정: 결정 1일, 실행 중 수정 5회, 총 30일

참여적 결정: 결정 3일, 실행 중 수정 1회, 총 20일

모두가 참여해 결정했기에 실행 과정에서 저항이 적고, 수정 사항도 줄어든다.


오해 3: "권위가 없어진다"

리더가 직원들과 똑같이 행동하면 권위가 사라진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21세기에 필요한 것은 '권위'가 아니라 '영향력'이다. 권위는 직급에서 나오지만, 영향력은 신뢰에서 나온다.

한 리더십 전문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예전에는 계급장이 권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진정한 권력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함께할 때 생깁니다."


오해 4: "책임이 모호해진다"

모두가 참여하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는 지적도 있다.

이것도 오해다. 동행 리더십에서도 책임은 명확하다. 오히려 더 강화된다. 개인의 책임뿐 아니라 '공동의 책임'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의 사례가 좋은 예다. 넷플릭스는 극도로 자율적인 문화를 갖고 있지만, 책임도 그만큼 명확하다.

"자유롭게 결정하되, 결과에 책임져라. 그리고 팀의 성공에도 책임져라."



위기 상황에서 빛나는 동행 리더십

진정한 리더십은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다. 동행 리더십은 특히 위기 때 강점을 발휘한다.

코로나19 시기의 쿠팡

2020년 3월, 쿠팡 물류센터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언론은 연일 비판 기사를 쏟아냈고, 물류 대란이 우려됐다.

김범석 대표의 대응은 남달랐다. 그는 즉시 현장으로 향했다. 방호복을 입고 물류센터에 들어가 직원들과 함께 방역 작업을 했다.

"여러분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버팁니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대표가 직접 소독약을 뿌리고, 박스를 나르는 모습에 직원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김 대표는 현장 직원들과 함께 방역 시스템을 재설계했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쿠팡은 빠르게 정상화됐고, 오히려 '가장 안전한 물류센터'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대중공업 화재 사건

2022년, 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한영석 사장은 골프장에서 연락을 받았다. 그는 즉시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날아갔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직원 안전 확인이었다.

"다친 사람 없나? 모두 대피했나?"

그리고 방화복을 입고 화재 현장에 들어갔다. 위험하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위험한데 제가 안전한 곳에만 있을 수 없습니다."

진화 작업에 직접 참여하고,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켰다. 그리고 피해 직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위로했다.

한 직원은 이렇게 회상한다.

"사장님이 그을린 얼굴로 '괜찮으세요?'라고 물으시는데... 정말 우리를 걱정하시는구나 싶었죠. 그때부터 회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어요."



세대별 동행 리더십의 접근법

동행 리더십도 세대별로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각 세대가 원하는 '함께'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MZ세대와의 동행

MZ세대는 수평적 관계를 원한다. 그들에게 '함께'는 완전한 동등함을 의미한다.

카카오의 한 팀장은 이렇게 접근한다.

"직급을 빼고 영어 이름으로 부릅니다. 회의할 때도 나이순이 아니라 무작위로 앉아요. 그리고 막내부터 의견을 물어봅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다. 형식적인 수평이 아니라 진짜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한번은 신입사원이 제 아이디어를 정면으로 비판했어요. 순간 당황했지만 '좋은 지적이네. 네 말이 맞다'고 인정했죠. 그 후로 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X세대와의 동행

X세대는 균형을 중시한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를 원한다.

LG전자의 한 임원은 이렇게 말한다.

"40대 직원들과는 커피 한잔의 시간을 갖습니다. 업무 얘기 반, 개인 얘기 반. 그들의 경험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격려하죠."


베이비부머와의 동행

베이비부머 세대는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들의 경험과 헌신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50대 직원들에게는 조언을 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배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들의 지혜를 구하면서 함께 가는 거죠."



원격 근무 시대의 동행 리더십

코로나19 이후 원격 근무가 일상화됐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까?


줌 CEO의 버추얼 동행

줌의 CEO 에릭 위안은 원격 동행 리더십의 모범을 보인다.

매일 아침, 그는 전 직원에게 영상 메시지를 보낸다. 단순한 업무 지시가 아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제 강아지가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어요. 여러분도 반려동물 있으면 건강 조심하세요. 아, 그리고 오늘 중요한 제품 업데이트가 있는데..."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친근감을 만들고, 업무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전환한다.

또한 '버추얼 커피 타임'을 운영한다. 무작위로 선정된 직원과 15분간 화상으로 커피를 마시며 대화한다. 업무 얘기는 금지다.

"물리적 거리는 있지만 정서적 거리는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원격이라서 더 의도적으로 연결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토스의 하이브리드 동행

토스는 온오프라인을 결합한 동행 리더십을 실천한다.

주 2회 출근 : 대면 협업과 관계 구축

주 3회 재택 : 집중 업무와 개인 시간

매일 오전 스탠드업 미팅 : 온라인으로 15분

월 1회 전사 오프라인 모임 : 깊은 연결

이승건 대표는 재택 근무 날에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슬랙에 수시로 들어가서 대화에 참여해요. '오 이거 좋은데?' '이런 방법은 어때?' 같은 코멘트를 답니다.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함께 일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하려고요."



동행 리더십의 성과 측정

동행 리더십의 효과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KPI로는 한계가 있다. 새로운 지표가 필요하다.

정량적 지표

직원 참여도(Engagement) 점수

자발적 제안 건수

부서 간 협업 프로젝트 수

이직률 (특히 자발적 이직)

360도 피드백 점수

정성적 지표

"우리 팀"이라는 표현 빈도

실패를 공유하는 문화

상향식 의사소통 활성도

심리적 안전감 수준

자발적 야근/주말 근무 (강요 아닌 자발)

한 HR 전문가는 이렇게 조언한다.

"가장 좋은 지표는 '리더가 없을 때 팀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입니다. 진짜 동행 리더십이 작동하면, 리더가 없어도 팀은 알아서 잘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있으니까요."



동행 리더십의 어두운 면

모든 리더십 스타일이 그렇듯, 동행 리더십도 단점이 있다. 이를 인식하고 보완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의사결정 지연

모두의 의견을 듣다 보면 결정이 늦어질 수 있다. 특히 긴급한 상황에서는 문제가 된다.

해법 : 상황별 의사결정 모드 구분

긴급 : 리더 단독 결정 후 설명

중요 : 핵심 인원과 신속 논의

일상 : 충분한 참여와 논의


2. 책임 희석

모두가 참여하면 책임감이 분산될 수 있다. "다 같이 정했으니 내 책임은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해법 : 역할과 책임의 명확화

참여는 하되 최종 책임자 지정

개인별 역할 문서화

정기적 책임 점검


3. 갈등 관리의 어려움

다양한 의견이 나오면 갈등도 늘어난다. 이를 조정하는 것이 리더의 새로운 과제가 된다.

해법 : 건설적 갈등 문화

갈등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기

아이디어 갈등 vs 인간 갈등 구분

갈등 해결 프로세스 확립



한국적 맥락에서의 동행 리더십

한국 기업에서 동행 리더십을 실천할 때는 문화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위계 문화와의 조화

한국은 여전히 위계를 중시하는 문화다. 이를 무시하고 서구식 평등을 강요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이렇게 접근한다.

"형식적 위계는 유지하되 실질적 소통은 수평적으로 합니다. 회의실에서는 직급순으로 앉아도, 발언은 누구나 자유롭게. 호칭은 '님'을 쓰되 의견은 평등하게."


정 문화의 활용

한국의 '정' 문화는 동행 리더십과 잘 맞는다. 이를 적극 활용하면 된다.

"팀 회식을 자주 합니다. 술 강요는 절대 안 하지만, 함께 밥 먹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은 중요하게 생각해요. 한국 사람들은 밥 먹으면서 마음을 여니까요."


체면 문화 고려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것을 꺼리는 문화도 고려해야 한다.

"피드백은 1:1로 합니다. 공개적으로는 칭찬만 하고, 개선점은 개별적으로 이야기해요. 그래야 체면도 지키고 발전도 할 수 있으니까요."



미래의 동행 리더십

동행 리더십은 어떻게 진화할까? 몇 가지 트렌드가 보인다.


AI 시대의 동행

AI가 팀의 일원이 되는 시대가 온다. 리더는 인간과 AI를 함께 이끌어야 한다.

한 IT 기업 CEO는 이미 실험 중이다.

"ChatGPT를 팀원처럼 대합니다. 회의에도 참여시키고, 의견도 물어봐요. 'AI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으면 인간 팀원들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거든요. 인간과 AI가 함께 가는 리더십을 연습하고 있어요."


다양성과 포용의 동행

미래 조직은 더욱 다양해진다. 다른 문화, 다른 세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일한다.

글로벌 기업 P&G의 한국 지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7개국 출신 직원들이 함께 일합니다. 각자의 문화적 배경을 존중하면서도 하나의 팀으로 움직여야 해요. '함께 간다'의 의미가 더 복잡하고 풍부해지는 거죠."


목적 중심의 동행

MZ세대는 단순히 돈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의미와 목적을 찾는다. 미래의 동행 리더십은 '왜 함께 가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패타고니아가 좋은 예다. 이본 쉬나드 창업자는 회사를 지구에 기부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사업을 합니다. 이 목적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직원들은 단순히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를 위해' 일한다. 더 큰 목적을 향해 함께 가는 것이다.



동행 리더십 실천을 위한 30일 로드맵

이론은 충분하다. 이제 실천이다. 다음은 동행 리더십을 시작하기 위한 30일 로드맵이다.

1주차 : 관찰과 경청

매일 다른 직원과 커피 마시기

회의에서 말하기보다 듣기

"어떻게 생각해?"를 하루 10번 이상 묻기

직원들의 일상 관찰하기

2주차 : 물리적 동행

임원실에서 나와 직원들 사이에서 일하기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식사

현장 방문 늘리기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이용 (만남 늘리기)

3주차 : 정서적 연결

직원 개인사 기억하고 물어보기

실패 사례 먼저 공유하기

성공은 팀에게, 실패는 나에게

진심 어린 감사 표현하기

4주차 : 함께 결정하기

중요 결정에 팀원 참여시키기

브레인스토밍 세션 진행

반대 의견 적극 요청

결정 과정 투명하게 공유

한 중견기업 대표가 이 로드맵을 실천한 후기다.

"처음 일주일은 정말 어색했어요. 20년간 해온 방식을 바꾸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2주차부터 직원들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3주차에는 직원들이 먼저 다가와서 의견을 내더라고요. 한 달 후에는 완전히 다른 조직이 됐습니다."



리더를 위한 자기 점검 질문

매일 저녁, 다음 질문들로 스스로를 점검해보자.

오늘 나는 앞에서 끌었는가, 함께 걸었는가?

몇 명의 직원과 진정한 대화를 나눴는가?

내 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들었는가?

직원들이 편하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었는가?

성공은 나눴고, 실패는 내가 짊어졌는가?



직원을 위한 가이드: 함께 가는 팔로워십

동행 리더십은 리더만의 몫이 아니다. 구성원들도 '함께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1. 적극적 참여

리더가 의견을 물으면 적극적으로 답하자. "글쎄요..."가 아니라 "제 생각에는..."으로 시작하자.

2. 건설적 반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더 나은 방향을 위한 반대를 하자. "안 됩니다"가 아니라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3. 주인의식

"우리 팀"이라는 생각을 갖자. 리더가 결정하면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결정하고 함께 책임진다.

4. 상호 지원

동료가 어려움을 겪으면 돕자.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라는 인식을 갖자.



동행 리더십의 글로벌 사례

뉴질랜드 저신다 아던 전 총리

코로나19 대응에서 보여준 동행 리더십의 교과서적 사례다.

"우리는 500만 명의 팀입니다."

이 한 문장이 뉴질랜드를 하나로 만들었다. 총리와 국민이 함께 가는 팀이라는 인식. 그 결과 뉴질랜드는 코로나19를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한 나라가 됐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동행 리더십을 보여줬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대통령궁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남았다. 방탄복을 입고 거리를 걸으며 시민들을 격려했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국민의 놀라운 단결력을 만들어냈다.



동행 리더십이 만든 기업 문화

동행 리더십이 정착된 기업들은 독특한 문화를 갖게 된다.

1.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

함께 가니까 실패해도 함께 일으켜준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정감이 도전을 가능하게 한다.

2. 혁신이 일상인 문화

모두의 아이디어가 존중받으니 창의성이 폭발한다. 막내의 아이디어도 CEO의 아이디어만큼 중요하다.

3. 서로 돕는 문화

경쟁보다 협력이 강하다. 동료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는다.

4. 지속 가능한 문화

번아웃이 줄어든다. 혼자 짊어지지 않고 나누니까. 일이 즐거워진다. 함께하니까.



함께 가는 길이 멀리 간다

아프리카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21세기 리더십의 본질이 이 한 문장에 담겨 있다.

산업화 시대에는 빨리 가는 것이 중요했다. 강력한 리더가 앞에서 끌고, 나머지는 따라가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빠른 것보다 오래 가는 것이, 혼자 똑똑한 것보다 함께 지혜로운 것이 중요하다.

진정한 리더는 정상에 혼자 오르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때로는 앞에서 길을 내고, 때로는 뒤에서 밀어주고, 때로는 옆에서 함께 걷는 사람이다.

한 CEO의 고백이 인상적이다.

"젊었을 때는 슈퍼맨이 되고 싶었어요.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는 영웅 말이죠. 그런데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니 깨달았어요. 진짜 리더는 슈퍼맨이 아니라 셰르파라는 걸.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셰르파처럼, 팀원들이 각자의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돕는 게 리더의 역할이라는 걸요."

"나를 따르라"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나와 함께 가자"의 시대다.

위에서 명령하는 리더가 아닌, 옆에서 함께 걷는 리더. 앞에서 끄는 리더가 아닌, 함께 미는 리더. 혼자 빛나는 리더가 아닌, 모두를 빛나게 하는 리더. 그것이 21세기가 원하는 리더의 모습이다.

리더십은 직급이 아니다. 함께 가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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