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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이나 Jan 23. 2024

내면을 깨뜨리는 치명적인 악.

가정폭력

계모는 왜 신데렐라를 괴롭혔을까.

가정폭력은 아주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손과 발로 신체를 해하는 폭력뿐만 아니라 욕설이나 인격을 깎아내리는 말. 한 공간에 가두어 나오지 못하도록 감금하는 행위, 어린이의 나이에 필요한 학습 제공의 부재, 의식주에 대한 방치. 방임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가정폭력이죠. 이 가정폭력이 최악의 상황이 될 때까지 해결이 되지 못하고 뉴스에서 비극적인 보도로 종종 나오는 이유가 뭘까요. 제 경험으로 비추어본 건데 가장 가까운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범죄이기 때문에 쉬이 알아내기가 힘듭니다. 현관 밖으로 무슨 소리가 나가더라도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요즘은 사회복지 시설, 어린이집, 학교, 의료병원 여러 기관에서 아이를 관찰하고 모니터 하기 때문에 더 빨리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하는데 그래도 늦습니다. 이미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 애도하는 건 너무 늦습니다. 저 집 일은 저 집 사정이지. 전문가들도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1980,90년대는 가정이든 학교든 아이들을 훈육한답시고 손으로 혹은 매로 때리는 일은 다반사였죠. 그래서 어느 가정에서 버젓이 폭행이 일어나도 "에고 저 집 또 저러니에..", "조용할 날이 없어~" 오며 가며 속닥거리는 게 전부였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계모는 왜 신데렐라를 괴롭혔을까요?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있다면 댓글로 
나눠주시면 감사할 거 같아요.


가정폭력은 깊은 상처를 낳는다.


 어린 시절 무분별한 폭력에 노출되어 성장한 아이들은 사랑과 관심, 제대로 된 훈육을 받지 못하고 자랍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어른은 자제력이 전혀 없으며 자신이 받고 있는 좋지 않은 감정을 오롯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자녀에게 퍼붓게 되죠. 그 자녀는 사랑이 없는 폭력 가정 안에서 방치되어 자라다 성인이 되면 부모와 비슷한 행동을 되풀이하거나, 사회에서 충동적인 행동을 하여 마찰을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흔히 쓰던 단어인 계모. 낳아 준 엄마가 아닌 집에 새로 들어온 계모 손에서 컸습니다.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계모 이야기를 하냐고요? 제가 보고 싶은 엄마는 나를 성인 때까지 보살펴 준 새엄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폭력 이야기를 하냐고요? 그녀는 나와 제 동생을 폭언, 폭력과 방임으로 돌보았기 때문에 폭력 가정에서 자라면 어떤 후유증(?)이 남는지 먼저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네. 맞아요. 엄마에 대한 제 마음은 양가감정입니다. 어릴 적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가 성인이 되니 약한 노인이 되어 병석에 누워 기기에 의지하다 조용히 눈을 감은 사람. 그 사람이 살아온 삶 또한 가정폭력의 슬픈 현실이 만든 섞은 고목나무 같아서 너무 서글퍼 동정이 가다가도 분노로 저주를 퍼붓기도 했던 옛 자아상을 만들어 내던 사람. 


저는 아직도 구제받지 못했던 그 시절의 스크레치가 남아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나에게 그때 미안했다고 한 번만 이야기 해달래도 당사자는 없고, 한 명은 아프고 말이죠. 결국 내 안에 남아 있는 피멍과 상처들은 혼자서 끌어안고 꾸역꾸역 깊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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