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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효이재 Apr 20. 2024

3.1 가장 인간다운 인간: 초개인 (1)

3.1.1 왜 초개인인가? 니체의 낙타, 사자, 어린아이 비유

 Ólafur Arnalds - "Near Light"


 기업들은 하나의 중앙도시 기업으로서의 성장을 꾀할 것인지 아니면 어떤 중앙 도시(중앙 플랫폼 화된 기업)와 연합할 것인지를 의사결정해야 할 것입니다.(참고: 도시를 닮은 기업) 또 생존을 위해 죽을지(완전 흡수, M&A) 자기 유사성을 갖되 느슨한 연대를 추구하는 독립된 조직이 될지도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과거에도 이런 패턴은 존재했겠지만 그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고 의사결정의 속도와 질에 대한 양쪽의 압력은 더 커질 것입니다.


 이는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개별 기업에게도 부담이지만 일련의 흐름을 그 조직에 속한 개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칫 더 큰 부담과 어려움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직장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어떤 기업, 조직에 합류하는 구성원일수록 조직에 오래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은 자의 반 타의 반 여러모로 줄어들 것입니다. 구성원은 언제 자신이 속한 기업, 조직의 갑작스런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에 대해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조직의 죽음-합병 또는 해체-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개개인은 더 이상 다니는 ‘회사’자체에 의의가 있는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그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전문성을 가지고 어떤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좀 더 어려운 것은 그 직업에서 요구되는 전문성, 역할 마저도 외부 환경 변화에 따라 언제 변화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시장 변화의 속도에 맞춰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변화에 감각적으로 ‘적응’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를 거부하고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는 순간 우리는 그 지점에서의 역량을 필요로 하는 기업의 한 때를 찾아 유목민처럼 이동해야 하게 될 것이고 그 빈도수가 과거에 비해 현격히 늘어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어찌해야 한다’는 류의 당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미 벌어지고 있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불가피하고 사실적인 변화입니다. 때문에 ‘나는 그런 변화가 싫어’, ‘내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야’와 같은 생각은 우리가 사실 속 현실을 살고, 또 미래를 준비함에 있어 그리 도움이 되는 자세는 아닙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하려는 바는 ‘불가피한 변화에 맞춰 우리 인간은 어떤 인간이기를 추구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수많은 인간의 속성 가운데에서 어떤 부분을 좀 더 관심 가지고 이끌어 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가 말한 인간의 세 가지 변신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려 합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에 비유했습니다. 낙타는 기존의 관습과 규범을 짊어지고 관성에 순응하면서 거기서 부과된 무거운 짐을 진 존재입니다. 낙타가 대변하는 정신은 ‘너는 해야한다’는 당위, 권위의 정신입니다. 다시 말해 명령과 복종의 정신입니다. 명령하는 자, 조직과 복종하는 자, 조직이 따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복종 하는자, 낙타는 시스템의 질서를 바꿀 수 없고 이에 저항하는 것은 곧 처벌의 대상입니다.


  그는 인간이 낙타에 머무르지 않고 ‘사자’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자는 용맹하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저항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사자의 정신은 ‘자유의 정신’입니다. 타인의 명령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주체적 인간 정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자는 주체성과 자유를 위해 마땅히 당위와 복종을 강요하는 ‘용’ – 용은 ‘너는 해야한다’는 이름을 가진, 신 혹은 아버지 적인 권위와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 과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자는 무엇을 위해 부정하고, 파괴하고 저항하는가? 이는 당연히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함입니다. 니체는 관습과 타성에 의해 주어진 무거운 짐을 그저 지고 가는 것이 삶의 최선이 아니며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원칙을 스스로 세우라 강조합니다. 규범, 원칙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세우는 것은 곧 자율autonomy입니다. 영어로 ‘Autonomy’라 표현되는 자율성은 앞에서 정리한 바 있듯 인간의 내적 동기를 자극하는 핵심적인 동력이기도 합니다.[1]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사자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하고 쟁취할 수 있지만 새로운 가치 자체를 창출하지는 못합니다. 그 몫은 어린아이의 몫입니다.  "그러나 말하라, 나의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유를)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얻는다."[2]


 니체에게 어린아이는 순수한 긍정입니다. 선입견과 편견이 없이 새로운 시각을 세상에 투영할 수 있습니다. 삶을 무거운 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놀이와 유희로 통합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응합니다.



[Reference]

[1] 심리학자 리처드 라이언(Richard M. Ryan)과 에드워크 데시(Edward L. Deci)는 인간이 내재적 동기를 갖기 위해서는 자율성(Autonomy), 유능감(Competence), 관계성(Relatedness) 욕구가 충족되어야 하며 이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선천적이며 심리적인 욕구라고 주장했다.

[2]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 이진우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휴머니스트, 2020, 1부. 세가지 변신에 대하여, 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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