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에게 주는 경고 혹은 응원의 메시지
지난해 12월
나는 3n 년만에 처음으로 사주라는 것을 보았다
원체 귀도 얇은 성격이라 어쩌면 사주라는 것을 일부러 피해왔을지도 모르겠다
잘 피해오던(?) 와중 함께 육아하던 언니가 사주를 보고 온 이야기를 문득 해주었고, 왜인지 모르겠으나 '저도 볼래요!'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예약까지 해버렸다
믿기지 않겠지만 난 사실 내 사주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이런 걸 근자감이라고 하나
아무튼 나는 태어나길 복이 많고 건강한 사람이라 줄곧 여기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래서 더 사주를 볼 필요성을 못 느꼈을지도..?
그리고 대망의 그날
약간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사주를 보러 향했다
내가 생각했던 곳은 어두운 분위기와 함께 근엄한 공간인데, 왠 걸
그냥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아.. 이미 여기서부터 내가 생각했던 게 틀렸구나
떨리는 사주 선생님과의 첫 만남, 첫마디
이수정 씨는 해외에 있어야 펴는 사주예요
이 말을 듣자마다 한 대 '쾅' 맞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나는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다문화, 다국적에 관심이 많고 해외를 좋아한다. 해외여행도 좋아하고 해외 살이도 좋아하고
중, 고등학교를 중국에서 보내고, 대학생 때는 교환학생, 배낭여행 등등을 거쳤으며 전공 또한 중어중문학과 문화관광학을 택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학생활 중 인턴생활은 관광통역안내사를 하고, 첫 취업은 여행사로 했다.
이직은 외국계회사로...
이쯤 되면 내가 얼마나 해외에 진심인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0여 년간 이어져 온 나의 장황한 해외 스토리를 선생님께서는 첫 문장으로 간파하셨다
어찌 다음 말을 집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외에서 살지 못할 형편이라면 해외여행이든 외국계 회사든 주기적으로 해외와 관련된 라이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이로써 나는 해외여행 & 해외 살이에 대한 정당성을 +1 하였다
그 후로도 인상 깊은 이야기들은 계속되었다
이수정 씨는 보기 드문 좋은 사주예요. 앞으로 몇 년 간 사주 볼 필요도 없어요. 이런 거 보면 저도 가끔 소름 돋아요.
그 소름이 나에게로 왔다.
원래 사주 보러 가면 이런 말씀하는 건가..? 내가 듣기론 이런 분위기가 아니라고 했는데 말이다.
어찌 됐든 나는 26살부터 36살까지가 대운이라고 말씀하셨다.
26살부터 이루고 싶은 건 다 이루고 살지 않았냐고 물으시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었다
어떤 것을 이루고자 할 때 물론 노력 없이 대가를 바란 적은 없다. 대학 진입도 자격증도 취직도, 하고자 하는 일들도
다만 노력한다고 언제나 다 가질 수 있는 건 아닌데 난 웬만한 건 다 가질 수 있었다. 이게 바로 "대운"의 기운을 받은 것일까
그럼 가만 보자..
내가 올해 34살이니 남은 대운은 앞으로 2년인가...?
그 후로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80% 정도는 얼추 맞아떨어졌다. 미래는 알 수 없으니 과거를 기준으로 말이다.
여기까지가 좋은 이야기였다면 이제 내가 받은 좋지 못한 이야기들을 두 어개 풀어볼까 한다
우선 우리 아이들이다
아이들 이야기만 나오면 심장이 쿵쾅쿵쾅..
우리 아이들은 너무도 어리기 때문에 사주를 별도로 보진 않지만 나와 배우자에게 딸린 자식운으로 어렴풋이나마 곁들여 볼 수 있었다
그리고 2025년은 둘째 아이에게 조금 힘든 한 해가 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몸보다는 마음이
겉으로 티가 나진 않지만 마음이 힘들 수도 있으니 올 한 해는 자식 케어에 더 집중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하셨다
약간은 찝찝한 마음을 안고 지내던 와중, 정말로 둘째에게 변화가 생겼다
둘째의 변화라기 보단 나의 심경 변화랄까?
둘째 이상 맘들은 공감할 것이다. 어쩌면 둘째는 곁다리로 키운다는 것을.
말은 하지 못했지만 나조차도 사실 첫째에게 해준 것에 비해 둘째에겐 너무도 해준 게 미약하다
그 때문인지 둘째는 발화도 늦은 편이었고, 가끔은 애착관계에 혹시 문제가 있진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첫째만큼 둘째에게 신경 썼다면 지금 조금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중 돌연 잘 다니던 어린이집을 퇴소시키고 둘째 가정보육을 선언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엄마로서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주고자. (실은 엄마로서 못해준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자..)
그렇게 나는 어쩌다 보니 사주가 주는 조언대로 둘째에게 집중하는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사주가 남겨 준 두 번째 경고
이건 당장의 일은 아니지만 나의 남편이 중년에 저물었을 때 크게 아플 수도 있다고 하셨다
어쩌면 이 부분도 꺼내지 않은 내 마음속 언제나 존재하던 불안이기도 했다.
남편은 가족력도 있을뿐더러 음주를 정말 사랑한다
적당한 음주는 스트레스 해소, 사회생활 등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우리 남편은 알코올 그 자체를 즐긴다
지금은 젊으니 괜찮지만 앞으로 10년, 20년 뒤가 심히 걱정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본인을 위해 절주, 금주 등을 여러 번 이야기했으나 작심삼일 말짱 도루묵이었다
평소의 음주 습관 때문에 크게 아플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신랑에게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남편과 서로 암묵적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문제를 이제는 수면 위로 꺼내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매일 같이 얘기하면 잔소리, 제3자가 한번 던지면 경고
당신이 좋아하는 그 술 때문에 크게 아플 수도 있다는 사주의 경고를 받아들인 것인지 신랑은 그날을 계기로 꽤 절주를 시작하였다
사주를 본 지 3개월이 흐른 지금
어쩌면 사주란
'너는 과거에 이런 사람이었어. 넌 앞으로 이렇게 살아가게 될 거야.' '넌 이런 팔자를 타고 태어났으니 이렇게 살렴' 이런 메시지가 아니라
'너는 과거에 이런 사람이었어. 넌 앞으로 이런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많은데 어떡할래?'라는 물음을 제공하는 수단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진 장점은 더욱 부각하고 내가 가진 약점은 최대한 줄이며 살아가라는 지표
해외를 좋아하는 나에게 해외가 맞다는 조언은 "세계일주"라는 더 큰 꿈을 가지게 해 주었고,
자식이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단 경고는 올 한 해 자식 케어에 더욱 "집중"하도록 만들었고,
평소에 가진 식습관 때문에 크게 아플 수도 있다는 경고에는 "절주"를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만일 내게 주어진 운명이 동그라미라면 그 동그라미는 타원일 수도 구의 형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동그라미라는 운명 안에서 길쭉한 타원형을 만들어 갈지 둥글디 둥근 원을 만들어 갈지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 네모라면
직사각형의 네모로 살아갈지, 마름모의 네모로 살아갈지, 정사각형의 네모로 살아갈지 또한 내가 그리는 것에 따라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난 아플 사람이래'가 아니라 '난 크게 아플 수 있는 운명이니 최대한 덜 아프게 지나갈 수 있도록 신경 쓰자!'
'난 해외에 있을 때 좋은 사주래'가 아니라 '난 해외에 있을 때 활기를 펴는 사람이니 그동안 꿈꿔왔던 세계일주를 더 큰 도전을 해보자!'
사주는 어쩌면 우리 인생을 이렇게 살아가라는 지시가 아닌
당신의 운명은 이러이러한데, 이대로 받아들이겠어요? 아님 그 안에서 부스터를 받아 하늘을 날아보시겠어요? 혹은 당신이 가진 약점을 삶을 영위하며 최대한 줄여보시겠어요?
라는 응원 혹은 경고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