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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나를 화끈하게 위로해 줬던 라면

[맛집을 찾아서] 틈새라면

by 챠크렐

'맛집을 찾아서'는 단순히 맛집을 알리는 차원을 넘어, 맛있는 음식과 함께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다룹니다.



한 10년 전이었다. 당시 나는 한창 기자가 되기 위한 소위 '언론고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 신문사와 방송사는 입사 시험 난도가 그야말로 '고시' 수준으로 어렵다고 해서 그러한 별칭이 생겼다. 나는 그 바늘구멍을 뚫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운 좋게 서류전형과 필기전형은 곧잘 통과했다. 이제 남은 관문은 실무평가, 그리고 최종면접이었는데... 여기가 내겐 큰 장벽이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방송사 실무평가였다. 방송사들은 보통 필기시험을 통과한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실무면접, 토론, 카메라테스트 등이 결합된 평가를 치른다. 내게 가장 큰 장애물은 카메라테스트였다. 원래도 방송기자보다는 신문기자를 지망했지만, 카메라테스트를 두어 번 본 이후 방송기자는 안 맞는다는 생각을 굳혔다.


나는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얼어붙었다. 주어진 리포트를 읽기만 하면 되는데 마음처럼 술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더욱이 같이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은 그야말로 '선남선녀'들이었다. 키도 훤칠했고 기본 외모도 다 괜찮았다. 이들이 모든 것을 끌어모아 한껏 꾸몄으니 더더욱 비교됐다. 정말 내가 문자 그대로 '오징어'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카메라테스트에서 기가 죽어버리니 이어진 실무면접, 토론 등의 과제에도 여파가 있었고 결국 불합격을 예감한 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이때 처음으로 SBS 목동사옥을 가 봤다. 2014년 10월이었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분노, 결과에 대한 체념 등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도저히 이대로는 집에 갈 수 없었다. 그때 나를 위로한 음식이 바로 틈새라면이었다.


틈새라면은 한국에서 시판된 라면 중 가장 매운 라면이다. 여기가 가게도 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KBS 면접에서 탈탈 털린 직후, KBS 본관 앞에 자그맣게 자리 잡은 틈새라면 가게에 무심코 들어가 가장 매운 단계의 라면을 시켰다. 얼마나 매운지도 모르고 무작정 주문했다. 잠시 후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면을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으니 조금 후 화끈한 느낌이 확 올라온다. 어느새 입 전체가 얼얼함과 매움으로 가득 차니 땀이 뻘뻘 흐른다. 국물까지 같이 먹으니 매운 느낌은 더욱 강해진다. 워낙 맵다 보니 입 안에 난 불을 끄기 위해 자꾸만 찬물과 단무지(여기서는 '파인애플'이라고 한다)를 먹게 된다. 어느 순간 쿨피스까지 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면과 건더기는 물론 찬밥까지 말아 국물까지 절반 이상 먹었다. 그야말로 매움에 몰입해서 먹다 보니 신기하게도 머릿속의 온갖 복잡했던 감정들이 잠시나마 사라졌다.


그 느낌은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원래도 매운 음식을 잘 먹는 편이었지만, 매운 걸 먹음으로써 스트레스를 푼다는 게 무슨 뜻인지 너무도 잘 와닿은 순간이었다. 비록 다음날 속은 좀 아팠지만 그래도 그 순간 폭발하는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줬다는 점에서 그 순간의 매움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이후에도 나는 크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틈새라면과 같은 매운 라면, 혹은 마라탕을 찾곤 한다. 결국 어느 IT 중견 전문지에 붙어 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기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었고 나는 매번은 아니었지만 꽤 규칙적으로 매운 라면, 혹은 매운 마라탕을 찾았다. 그때마다 늘 이들은 제 역할을 다해줬다.


틈새라면 KBS여의도본관점 가게 내부. 좀 애매한 시간대라 손님은 없었다.
방송국 바로 앞에서 10년 넘게 운영해서 그런지 연예인들의 사인이 아주 많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난 기자를 그만두고 커리어 전환을 하게 됐고 이전보다 훨씬 스트레스를 덜 받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사실 브런치를 재개한 이유도 그 덕분이 컸다). 오랜만에 틈새라면이나 한번 먹어볼까 하고 10년 전에 갔던 KBS 앞 틈새라면에 방문했다. 사실 그 이후에도 이곳에 몇 차례 방문했는데(주로 국회 일정이 끝나고 저녁식사를 이걸로 대신했다) 그때마다 늘 '빨부대(일반 빨계떡에 햄과 소시지, 콩나물 등을 추가한 라면)'에 고기만두(혹은 소고기김밥)를 먹곤 했다. 신기하게도 스트레스가 큰 날일수록 라면도 더욱 잘 넘어갔다.


다만 이날은 점심이라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빨부대에 찬밥만 하나 시켰다. 이제 맵기를 정해야 했는데... 평소라면 '가장 매운맛'으로 시켰겠지만 이번에는 그냥 '중간 매운맛'으로 시켰다. 중간 매운맛이라고 해도 신라면의 3배 정도 맵기다(가장 매운맛은 5-6배 정도라고 한다). 평소라면 후폭풍을 감수하고 가장 매운맛을 먹었겠지만 오늘은 그렇게까지 해서 매운 것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간만에 나름대로 추억의 가게에 방문한 데 의의를 두기로.


중간 매운맛 '빨부대'의 모습. 가장 매운맛은 이것보다 좀 더 빨갛다.

중간 매운맛은 확실히 덜 맵다. 요즘 워낙 틈새라면 말고도(틈새라면만큼은 아니지만) 매운 라면이 많이 시판되고 있는데 체감상 이들보다 살짝 더 매운 정도인 듯. 매운 걸 좋아한다면 그냥저냥 물을 마시며 먹을 수 있을 정도다. 라면과 소시지를 건져 먹다가 반쯤 남았을 정도에 찬밥을 말아준다. 밥을 말았을 때는 숟가락으로 라면 국물이 흥건한 밥알과 남은 면 몇 가닥을 한 번에 건져먹는 것도 별미다. 역시 라면에는 찬밥이 환상의 궁합이라는 생각을 한다.


면을 한껏 건져서 한 입.
찬밥을 말아먹으면 더 맛있다.

사실 먹고 나서 내 생각보다 매운맛이 덜해서 좀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무리하면서까지 극도로 매운 음식을 먹어야 하는 상황은 전보다 확실히 줄었다. 업무 스트레스도 전만큼은 아니고, 약 9년여 정도 기자를 하는 동안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내 나름대로 스트레스 관리를 하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점점 나이를 먹으니 예전 취준생 시절만큼 위장이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매번 실감해 왔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매운 음식은 금요일이나 토요일 저녁에만 먹었다. 다음날 설사 후폭풍이 생기더라도 일을 하지 않는 날이라 그나마 타격이 덜하기 때문에... 그래서 라면이 좀 덜 매웠음에도 만족하며 계산을 할 수 있었다.


매운 걸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게 물론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히 그 당시 내가 스트레스를 빠르게 풀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만일 그 숱한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면, 이후에 내가 그래도 힘을 내서 무언가를 소소하게나마 이룰 원동력도 보다 약해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틈새라면이랄지 마라탕이랄지 그런 매운 음식들이 생각나는 것 같다. 가끔은 그 순간에 스트레스를 반드시 풀어줘야 하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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