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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쟁이 Apr 11. 2021

술 때문에 알게 된 것들

좋아하는 것을 찾고, 쫓는다는 것에 대하여

 부르고뉴에서의 여행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매서운 우박을 만나기도 하고, 마침 월드컵 결승 날이라 프랑스가 우승하는 순간을 함께하기도 했다. 술 때문에 무작정 떠난 여행 치고는 정말 다양한 이벤트들을 마주쳤다. 그리고 마침내 이 여행에서 챙길 기념주로 6병의 브루고뉴 와인을 항공편으로 주문했다. 지금도 그중 3병은 셀러에 잘 보관되어 있으며, 언젠가 아주 좋은 날 기념으로 뜯어볼 생각에 잘 쟁여두고 있다.

 

 여행 막바지에는 뭔가 이런 여운들을 곱씹어볼 새 없이, 파리로 돌아가 한국으로 가져갈 기념품들을 챙기고, 정신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여전히 술에 대해 잘 몰랐던 시기고 거기까지 간 김에 즐겼어야 하는 더 많은 것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아쉬움이 갈수록 남는, 벌써 2~3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술 한잔 할 때면 떠오르는 시간인지라 이 글을 써보게 됐다.


 처음엔 무작정 마시는 게 좋았다.

 소주, 맥주, 양주 특별히 가리지 않고 좋아했고, 술자리의 그 어수선한 분위기도 좋았다. 다만 그중 제일 좋았던 것은, 종종 아버지가 장롱에서 내어주던 금빛의 찰랑이는 액체였다. 밖에 나가서 이상한 술들에 맛 들이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좋은 걸 마셔봐야 한다며, 처음 술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내어주셨던 술이 꼬냑이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이 20대 중반이었다. 그리고 그 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내 지갑으로 감당하기는 힘든 술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 지금, 내 20대의 마지막이 됐다. 아버지의 장롱과는 별개로 작고 아담하지만 내 나름대로의 술장도 갖게 됐다. 술 자체가 좋아서 쫓게 됐고, 술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됐지만, 이 여행에서 술 덕분에 알게 된 술만큼 좋은 사람들과 문화가 있었다.


 맛있는 술을 찾다 보니 맛있는 음식을, 그리고 요리까지...


 와인을 처음 접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안주와의 페어링에 대해 배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그에 어울리는 술이 생각났고 거꾸로 맛있는 술을 마실 때 어울리는 음식이 생각났다. 회를 먹을 땐 쇼비뇽 블랑이나 소주, 고기를 먹을 땐 레드와인이나 위스키, 다 먹고 날 때 즘이면 입가심으로 시원한 탄산감이 있는 칵테일. 이런 식으로 음식과 술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느꼈고,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직접 맛있는 안주거리를 만드는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모여 같이 여러 음식들을 요리하고 어울릴 술을 각자 한 병씩 챙겨 오면, 새벽까지 음식과 술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여전히 술이나 요리나 어떤 것을 아주 잘 안다고 말하기엔 너무 부족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이것저것 찾아보고 공부해가며 나름의 취미생활을 '가꾸어' 나가고 있다.


 사람에겐 취미가 필요하다.

 그것이 어떠한 취미일지라도, 사람은 본업과 별개로 취미가 필요하다. 단순하게는 본업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경로로서, 넓게는 한 번뿐인 삶을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의 취미생활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술에서 시작한 취미생활 덕에, 나는 배곯지 않는 자취생활을 했고, 사람을 만나고, 덕분에 외롭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몇 잔의 술에서 시작했던 이 여행은 내게 평생 갈 안주거리를 만들어줬다. 지금 이 글에도 미처 다 적지 못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서야 글로 정리하게 되어 까먹은 부분들도 많다 (그런 점이 너무 후회되는 것 중 하나다). 나는 여전히 이 여행이 내 음주생활에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이후의 내 삶의 태도를 바꿔놓은 좋은 전환점이 됐다고 여긴다. 사실 지금의 코로나 시국만 아니라면, 언젠가 또 그곳에 가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당장은 내 본업에 열중해야겠다는 생각뿐이긴 하다.


 한 번 즘,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잠깐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곳에 가보길 권한다. 정말 축구가 좋아서 직관을 하러 유럽여행을 가는 친구들도 있었고, 여행 중 만났던 사람처럼 클래식이 좋아 독일로 교환학생을 간 친구도 있었다. 그 시간은 분명 취미생활의 연장에서 그치지 않고, 당신의 삶에 있어서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대하는 어떤 방식들을 바꿔놓을 만큼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 너무 거창한 이야기가 됐지만,

내가 이 글을 적은 이유는 결국, 맨 앞에서 이야기했듯 나의 재밌는 술 안주거리들이 당신에게도 잠깐이나마 재밌는 시간이 됐기를 바라서였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나서 괜히 목이 타고 맥주라도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시간을 들여 이 글을 정리한 보람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잔 하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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