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San Francisco__샌프란시스코

by 해이문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여행의 사전적 의미이다.


여기서 "유람"의 의미는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일'이라고 쓰여있다.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은 맞는데 나는 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머무르며 구경을 한다기보다 사색에 잠긴다.


풀어보니 내게 "여행"이란, '마음에 드는 한 장소에 머무르며 사색을 할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정도 되겠다.


"금문교 갈 건데 갈 사람?"

"원데이패스(one-day pass) 말고 위클리패스(weekly pass) 교통카드를 사요. 그럼 이틀 동안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어요. 어차피 여기저기 다닐 거니까 그게 더 나아요"


"혹시 와이너리 (winery) 투어 하실 분?"

"저는 조개수프 맛집 갈까 하는데 가실 분?"


호텔로비에 도착하자 동료들의 대화가 오고 간다. 16시간을 바다 건너 날아왔는데 피곤하지도 않나 생각했다. 아 그렇지 어쨌거나 외국에 왔으니 여행을 해야겠지.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일, 여행.


"아뇨, 아직 안 가봤어요."

"어머 거이 매달 여길 오는데 금문교를 아직 안 갔다고요? 그럼 해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도대체 뭘 해요?"와 같은 피하고 싶은 대화가 오고 갈까 봐 제일 먼저 룸 키를 받아 올라왔다.


아직 기내식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은 유니폼을 벗고 임시로 샤워가운을 걸친다. 창문을 열고 유니폼을 탁탁 턴 후, 캐리어를 열어 좋아하는 에센셜 오일들로 직접 블렌딩 해 만든 탈취제를 찾아 유니폼이 젖기 직전까지 스프레이 한다. 조금이라도 햇빛이 드는 호텔방 어딘가를 찾아 고이 걸어 놓는다.


호텔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여기까지 마치고 나면 정신이 조금 든다.


눈 아래 가득히 번진 마스카라와 이마며 콧잔등이며 기름이 자자한 화장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 없다. 플립, flip! '스위치를 누르면 1초 만에 샤워 후 침대에 딱 누워있었으면 좋겠다'. 실현 불가능한 이 허황된 상상은 왜 매번 하고 있는 걸까.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몸을 던지면 이때부터는 진짜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외할머니 수박화채도, 파이 영상 통화도 (매 순간 보고 싶은 한국에 있는 나의 반려견), 나의 첫사랑 덴젤 워싱턴이 '나도 사실 너를 좋아했었다' 고백하며 장미 한 다발을 들고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해도.... 나는 일어날 수 없다.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된다.


젖은 머리로 잠이 들었다. 07:22 am 침대맡 전자시계 시간을 힐끗 확인했던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오후 2시쯤이었고 베개에 눌린 머리는 눅눅하니 여전히 마르지 않았다.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목을 스치는 바람은 시원하고 얼굴에 떨어지는 햇빛은 따뜻했다. 호텔 앞 작은 레스토랑에 앉아 나른함을 한껏 느끼며, 방금 나온 따뜻한 클램 차우더를 먹는 것. 내가 샌프란시스코 비행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일이다. 느긋히 앉아 차우더가 담겨온 촉촉해진 빵까지 쭉쭉 찢어 야무지게 다 먹었다.


몸이 먼저 기억하듯 일어나 서점을 향해 걸었다. 이곳에 오면 매번 가는 곳이다. "도시의 불빛 서점 (City Lights Bookstore)", 직역한 책방 이름이다. 입구 문을 열자 쿰쿰한 책냄새가 확 코에 닿는다. 그리워했었는지도 몰랐던 그리움 뒤에 따라온 반가움을 알아채고 일단 숨을 가다듬었다.


독립 책방은 오래된 3층건물이다. 걸을 때 이따금씩 끼익 끼익 소리를 내는 나무바닥이고, 나무책장에, 나무의자가 군데군데 놓여 있다. 나무계단을 따라 3층 시집코너로 올라갔다. 시는 단순한 듯 어렵고 어려운 듯 단순한 것 같다. 상세함이 없는 것 같으면서 단 한 줄로 마음을 쾅 때려버린다. 서서 왼발 오른발 발을 바꿔가며 골라 든 시집을 읽다 안 되겠다 싶어 나무바닥에 앉아 버렸다.


술술 읽다가

어떤 글귀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잠깐 쉬어야 하고

잠깐 창밖을 봐야 한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를 때면

내 마음대로 해석하곤 한다.


창밖을 보니 푸르스름한 저녁이

찾아오고 있었다.

여전히 책방에는 사람들이 많다.

떠나고 싶지 않은데 다행이라고 안심했다.


도시의 불빛 서점에서

시간도 잊은 채 머무르며

하루 종일 책과 내 마음을 구경하고 돌아다닌다.


내가 이곳에서 첫 번째로 좋아하는 일이다.


나도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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