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너무 피곤해서 호텔에서 쉴 것 같아"
"I'm exhausted. I think I'll just rest at the hotel."
언젠가부터 비행 레이오버에서 기본적으로 내가 던져놓는 말이다. 나도 비행 초기시절에는 삼삼오오 동료 크루들과 모여 레이오버를 즐기곤 했다. (레이오버/layover flight: 레이오버 비행은 승무원(들)이 목적지에 도착한 뒤, 보통 24시간 이상 일정 시간 동안 해당 도시의 호텔에 머무르며 쉬는 시간을 갖고 다시 비행하는 일정)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와는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매 비행 새로운 크루들과 일한다. 처음 만났더라도 두 섹터동안 소통하며 웃고 떠들곤 하지만, 여기서 안다는 의미는 진짜 그 사람을 "아는 것")
로비에서 3시까지 만나자고 하지만 분명히 5분, 10분 늦는 동료가 꼭 한둘은 있다. 기다리는 나의 시간이 아깝다. 비행하며 갤리에 앉아 이야기할 때는 분명 함께 타코도 먹으러 가고, 크리스마켓도 가고, 마사지도 받으러 가고 싶은 마음에 약속하지만, 막상 랜딩하고 호텔방에 들어오면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냥 쉬고 싶고 약속한 걸 후회한다.
가끔 제법 괜찮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계속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진파, 갑자기 두 동료가 다투는 싸움파, 각자 쇼핑한 후 호텔로 돌아갈 때 우버택시를 쉐어하자며 몇 시까지 어디서 만나기로 하지만 말없이 혼자 가버리거나 나타나지 않는 약속어김파, (여러 나라를 비행하기 때문에 간혹 비행간 나라의 통화가 준비되어 있지 않거나 신용카드 사용이 어려울 경우) 레스토랑에서 대신 계산해 주면 베이스인 아부다비로 돌아가서 준다고 해놓고 연락두절되는 먹튀파 (베이스/Base: 승무원의 거주지이자 비행이 시작되고 끝나는 도시), 번지점프하기 같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닌 액티비티를 불현듯 제안하는 갑작파 등을 경험하며,
이미 알고 있는 친구이거나 두어 번 비행을 같이해 성격이나 성향이 나와 잘 맞는 검증된 동료가 아니라면, 나는 레이오버에서 언제나 말한다.
"나는 호텔에서 쉴 것 같아." 이 말에는 자유로움이 있다.
정말 호텔에서 쉴 수도 있고, 누구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나갈 수 있고, 오로지 내 취향대로 서점이나 빈티지 스토어에 갈 수 있고, 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머무르고 떠날 수 있으며, 외출하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면 다시 호텔방으로 돌아가거나, 호텔 앞 슈퍼에서 후딱 장만보고 다시 들어올 수 있고, 행여나 동료를 마주친다 해도 "피곤해서 쉬려고 했는데, 잠이 안 와서 나왔다."라고 하면 그만이다. 함께할 것을 제안하면 가고 싶으면 가고,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함께하고 싶지만 너희들끼리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쿨하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외항사 승무원 인터뷰에서 면접관들은 틀림없이 지원자에게 묻는다.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니? 사람들과 잘 어울리니?"
"너는 다른 문화에 대해 (오픈 마인드) 열려있니?"
당신이 정말 그런 사람이건 아니건, 회사에 입사하고 싶다면 지원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해야 한다.
"응, 당연하지. 다른 문화를 알아간다는 건 항상 흥미로운 일인 것 같아. 또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건 내게 언제나 설레는 일이야."
이것이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아니 들어야 하는 정답이기 때문이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자체가 매비행마다 수십, 수백 명의 새로운 승객들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중동 항공사는 100개국이 넘는 다른 국가의 승무원들이 함께 일하는 곳이다. 위와 같은 질문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일하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른 문화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지만, 그것들 혹은 그들에 대해 알아가는 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내게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는 것.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거나 어울리는 것을 다소 피곤해하며 그것은 내게 설레는 일이 아니라는 것. 혼자 보내는 시간을 더 선호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편하고, 이 시간이 더 나답다는 것.
이 책에는 뉴욕 비행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시드니의 하버 브릿지도,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도, 암스테르담에서 자전거를 타며 따스한 봄햇살을 만끽하는 전직 승무원의 비행 이야기가 없음을 미리 알려둔다.
비행한 도시에서 느낀 매우 개인적인 생각과 경험, 감정들이 담겨있을 뿐이다.
연재을 시작하며 한참 만에 전 직장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았다. 내가 근무하던 당시 운항하던 샌프란시스코와 브리즈번은 노선이 종료되었고, 바르셀로나와 보스턴과 같은 새로운 취항지가 보인다. 출근하던 비행기와 착용했던 유니폼을 보니 오랜만에 뱃속에 예쁜 나비 한 마리가 소리 없이 날아다닌다.
그때는 매 비행이 버티는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그 시간들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다.
사진: 8월의 샌프란시스코
San Francisco in Augu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