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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박하 Nov 03. 2023

인생에 절대란 없다

다시 시작하는 일 앞에서

인생에 '절대 안 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뭔가 안 좋은 일들을 끊어내는 일들에는 해당한다. 술이나 담배, 안 좋은 습관들을 끊어내는 일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절대'라는 말은 오히려 다시 찾아오는 것 같다


20대 초반, 그 당시에는 해외 어학연수가 유행이었다. 부모님을 졸라 비행기 값과 매달 받는 용돈 약간 정도만 지원을 받기로 하고 영국으로 향했다. 20대 초반은 뭐든 가능한 시기였다. 아침에 들고 나온 빵 하나만 먹고도 하루종일 걸어 다닐 수 있었고 제일 저렴한 마트에서 구입한 500원짜리 타르트에도 행복했었다.


그 당시 1년여간 거의 김치를 먹지 않고 지냈었는데 언제나 김치를 먹어야 하는 인생을 살아왔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신선한 샐러드만 먹어도 괜찮았다. 아니 샐러드조차 먹지 않은 날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김치 없이도 살 수 있는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맞벌이를 하며 밥을 챙겨 먹는 일은 정말 어려웠는데 특히 한식으로 한 상 차려먹는 일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양가에서 들어오는 김치와 반찬들은 냉장고에서 유명을 달리하곤 했다. 그래서 그때 생각했었다. 내가 스스로 김치를 만들어 먹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꼭 김치는 조금씩만 사서 먹어야지라고 말이다.


몇 년 후 케냐에서 살게 되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20대 초반 홀로 떠난 홈스테이 어학연수와 아이까지 데리고 커다란 집에서 살림을 하는 해외살이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과 케냐도 너무 다르긴 하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김치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배추를 팔아줘서 너무 고마웠다. 케냐 살이는 너무 감사하고 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몸은 김치를 원하고 있었다.


마트에서 커다란 배추를 샀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서 피시소스로 만드는 김치 레시피를 찾아냈다. 부추니 쪽파니 전혀 들어가지 않는 그저 배추와 양념으로 만드는 김치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지금까지 우리 집 김치로 자리 잡았다. 2-3주에 한 번씩 커다란 볼을 꺼내 김치를 담그면서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김치를 담그게 될 줄은 20살의 나는 몰랐었다.


지금 나는 번역일을 다시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박사과정 중간에 휴학을 했었다. 그리고 번역가가 돼야지 생각하고 일을 받아서 했는데 그 당시 나는 정상이 아니었기에 결과물이 좋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몰랐다_ 그래서 클라이언트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앞으로는 '절대' 번역일은 하지 말아야지라고 말이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번역은 특히나 마무리가 중요한 일이다. 오역과 누락이 없어야 하고 주어와 동사, 수일치 등 챙겨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 영어에 대한 이해는 당연하고 한국어에 대한 이해도 너무도 중요하다. 소위 MBTI에서 파워 P를 담당하고 있는 나에게 번역일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 후로 번역일이 들어와도 조심스럽게 거절하며 지냈었다. 아마 내 인생에 번역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번역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번역밖에는 답이 없었다. 아이를 돌보면서 집에서 시간을 조정하며 일할 수 있는 재택일. 나는 디자이너도 개발자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가진 가장 큰 원천 기술인 영어와 한국어를 살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여러 번의 이사로 분리불안이 여전히 심해서 아직까지는 내가 필요하다. 좀 더 안정되면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리해서 회사를 다니느라 아이가 아프게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력서를 여기저기 돌리기 시작했다. 어제는 프루프리딩 일을 받게 되었다. 영어로 이메일을 쓰고 주고받았다. 번역 소프트웨어를 열었다. 이번에 번역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노트북 거치대도 구입했다. 거북목 방지를 위해서이다. 오늘도 열심히 이력서를 돌리고 영어공부를 하고 번역 연습을 하려고 한다.


이력서를 다시 쓰면서 마무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이쯤이면 되겠지에서 한번, 아니 두 번 더 보는 것 그것 만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말이다. 이력서를 100번도 넘게 새로 저장했다. 보고 또 보며 오타를 찾아냈다. 번역사이트에서 일감을 찾으며 생각했다. 인생에 '절대'란 없구나. 이제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 질지는 정말 알 수가 없다. 내년에 내가 어디에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삶은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몇 년은 카메룬에 있겠지 했던 내가 지금 한국에 있는 것 있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삶을 걷게 된다.


그렇기에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이곳 (Here and now)에 집중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사는 곳 살아있는 곳에서 하고 있는 일 함께 하는 사람들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내 삶을 지탱하고 살아가게 한다. 오늘도 내 앞에 주어진 삶을 성실히 걸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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