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이야기 #15
과거에는 현악기 산지의 최고를 꼽는다면 이견없이 이탈리아였다. 활 제작은 프랑스가 최고로 꼽혔고, 영국도 나쁘지 않다는 평을 들었다. 독일 현악기는 그럭저럭 쓸만하다는 ‘가성비’ 악기로 통했다. 적어도 20세기 초중반까지는 그랬다.
오늘날 현악기 원산지는 상당히 넓어졌다.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도 여전히 수준 높은 악기를 만들지만, 신흥 강국으로 미국과 중국이 꼽히고 있다. 미국이 이탈리아의 아성을 넘볼정도로 최고급 악기에 강하다면, 중국은 과거 독일과 동유럽 악기의 포지션을 빼앗는 상황이다(20세기 초반만해도 독일을 포함한 동유럽은 많은 인구수와 낮은 인건비로 오늘날 ‘메이드 인 차이나’ 느낌이 강했다).
특히 중국산 악기는 오늘날 중저가 악기 시장을 휩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의 낮은 인건비, 전문적인 제작교육을 받진 않았으나 오랜 시간 악기 제조 공장에서 일한 경험, 중국 남부의 풍부한 목재 등 삼박자에 힘입어 소위 말하는 ‘가성비’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 악기가 많이 만들어지는 곳은 중국 남부 도시 ‘광저우’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광저우 스쿨(?)’이 세계를 잠식할 거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당장 서초동 악기상을 방문해 100만~500만원 대 중국산 악기를 보여달라고 하면 상점마다 최소 10개 이상 들고온다. 실제 경험담이다. 악기들을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신묘(?)하다.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악기를 크기와 모양 그대로 흉내낸 뒤 제작자 이름도 붙이지 않은 악기부터해서 제작자 자기 이름을 걸고 만든 악기, 올드악기 흉내(엔티크)낸 악기, 악기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허접한 악기 등 다양하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에서 유독 유명한 중국악기를 꼽자면 ‘Scott Cao’와 ‘Ming Jiang zhu’를 말할 수 있다. 스캇카오부터 설명하면, 스캇은 현존해 있는 제작자다. 미국에 거주하면서 과거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중국 본토에 공장(공방이라고 말하기엔 규모가 많이 크다)을 차리고 악기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스캇의 공장악기 중 ‘750e’ 모델은 유럽 나무를 사용한 엔트리 모델로 150만원 선이라는 다른 유럽 나무로 만든 악기보다 저렴해 유명해졌다.
밍장주 역시 과거 미국 VSA에서 두 차례 금메달을 받으면서 유명세를 탔고 중국 광저우에 공장을 만들어 악기를 대량생산 중이다. 밍장주는 2020년 시점에서 이미 고인이고 밍장주의 형제가 공장을 운영 중이다. 스캇 제품과 유사한 ‘909’ 모델부터 독일산 나무로 만들었다고 홍보하면서 300만원 이하에 공급하며 근래들어 급격히 유명해졌다.
연주자가 취미생이면서 악기에 대한 욕심이 크게 없거나 악기를 구매하는데 많은 돈을 쓰고 싶지 않다면 중국산 악기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런 공장에서 찍어낸 악기들을 직접 시연해봤는데 정말 악기마다 비슷한 소리가 났다. 좋게 말하면 편차가 없이 균일한 품질을 가진 악기라는 뜻이고, 나쁘게 말하면 개성없는 악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악기의 만듦새도 나쁘지 않았다. 대충 만든 100달러 이하의 중국제 악기가 아니라 나름 제대로 된 공장에서 숙달된 근로자가 만든 악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명세를 탄 중국 공장악기는 알려진 만큼 되팔 때 수월한 면도 있다. 이러한 인기를 반영하듯 국내에서도 스캇과 밍장주 악기를 독점적으로 들여와 판매하는 악기상도 있다. 구매를 원한다면 그곳을 방문하면 된다.
스캇카오와 밍장주 이외에도 그에 못지 않는 ‘가성비’ 중국 악기는 찾을수록 발견된다. 정말 적극적이면서 중국어가 가능한 구매자는 직접 중국을 방문해 많은 제작자들을 직접 만나 괜찮은 악기를 ‘발굴’해 오기도 한다.
하지만 전공생 입장에서는 중국산 악기는 선호되지 않는다. 스캇카오 본인이 직접 제작한 악기가 가끔 2000만~3000만원에 떠돌기도 하지만 외면받는 실정이다. 그 가격대는 이탈리아나 미국같은 다른 선택지가 있기 때문이다. 밍장주가 살아 생전 만든 악기는 희귀해 매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기도 하다.
그래도 전공자 수준의 중국 악기를 구한다면 미국 VSA에 수상한 중국인 제작자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 추천된다. 최근 미국 VSA는 중국인 제작자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유는 아직 모르지만 중국 제작자들이 이탈리아 트리날레나 독일 미텐바흐 콘테스트보다 미국 VSA에 강하다는 것이 특이점이다(한국 제작자는 트리날레 입상자가 더 많다).
최근 VSA에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를 획득하며 유명세를 탄 중국인 제작자를 거론하자면 Feng Jiang이 있다. 게다가 펭지앙은 미국 유명 제작자인 Gregg Alf의 제자로 알려졌다. 참고로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면 앞서 말한 밍장주와 똑같은 수상 실적이다. 만약 펭지앙이 중국 본토에 악기 공장을 차리면 영락없는 밍장주 주니어다. 유명 중국인 제작자 역시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직접 제작한 악기만 팔면 각각은 비싼 값에 팔 수는 있겠지만, 한 해 만들 수 있는 악기는 많아봤자 10대 이하에 불과하다. 반면 공장을 차려 자신의 이름값을 팔아서 본격적인 영업행위를 하면 악평은 듣겠으나 한 해 수 천대의 악기를 만들어 팔 수 있다. 큰 부자가 되진 못했으나 명예로운 제작자로 남느냐, 명예를 훼손하고 큰 부자가 되느냐 딜레마다.
오늘날 중국제 바이올린은 국산 바이올린 브랜드를 정면으로 위협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공장형태로 악기를 제작하는 기업을 꼽자면 ‘효정’과 ‘심로’를 말할 수 있다. 과거에 바이올린을 배웠던 사람들에게는 ‘국민악기’로 통했고, 오늘날에도 AS 용이성 등을 이유로 사용하는 취미생들이 많다. 아직까지는 취미생들이 효정과 심로 선호도가 더 강하지만, 중국 악기의 선호현상이 날로 커지는 상황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