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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야 Mar 01. 2022

바이올린 활의 거장들

바이올린 이야기 #22

◆바이올린 활의 거장들


외젠 이자이와 아이작 스턴이 사용했던 프랑수와 사비에 투르트 바이올린 활


 바이올린 제작의 1번지가 이탈리아라면 바이올린 활 제작의 '메카'는 프랑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바이올린 활은 프랑스산이 많다. 


 프랑스 활이 가장 인정을 받는 이유는 제작자마다 다양하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 '주세페 과르네리', '지오반니 과다니니' 등 전설적인 바이올린 제작자가 이탈리아인이었고,  이들의 제자가 이탈리아 크레모나와 밀라노, 토리노, 볼로냐 등지에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현악기 활의 경우  '르 준' 투르트, 도미니크 페캇, 외젠 사토리 등 훌륭한 제작자는 프랑스인이었고, 이들의 제작 역시 프랑스에서 계보를 이어나가면서 유명세를 가져갔다.



■프랑수와 사비에 투르트 '르 준' (1748 – 1835)


프랑수와 사비에 투르트 1820년 작


 바이올린 활 제작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르 준'으로도 알려진 프랑수와 사비에 투르트(François Xavier Tourte 'le Jeune')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만든 현악기 활은 정교하고 우아한데다가, 뛰어난 장인정신이 깃든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르 준' 사비에 투르트를 말하기 앞서 투르트 가문(Tourte Family)을 먼저 말해보자. 르 준 투르트의 아버지 니콜라 피에르 투르트(Nicolas Pierre Tourte père)는 1700년에 태어나 1742년까지 목수로 일했다. 또한 1764년까지 살면서 현악기와 활을 만들었다. 


 당시에 바이올린 활은 활을 조이는 금속 나사 없이 볼록한 형태의 막대 형태였다. 피에르 투르트는 더 큰 소리와 음색을 위해 오늘날 활의 모습인 오목한 막대로 사용하는 것을 실험했다.



 피에르 투르트는 1756년부토 장남 니콜라 레오나르 투르트와 함께 제작했고, 이후 '르 준' 사비에 투르트 역시 아버지 밑에서 활 제작을 배웠다.


 '르 준' 투르트는 1748년에 태어나 1774년경 활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형인 레오나르 투르트와 함께 작업을 했지만, 1800년부터는 독자적인 활 제작으로 이름을 크게 알렸다.


프랑수와 사비에 투르트 '르 준'


 투르트 가문이 활동하던 시기는 활 제작의 격변기였다. 활의 길이는 길어지고, 활의 장력 향상을 위해 볼록했던 형태에서 오목한 모습으로 달라졌다. 또한 활 털의 장력을 미세하게 조절하도록 금속으로 된 나사도 형성됐다. 


 투르트의 활로 바이올린 연주 역시 많은 변화와 발전을 이뤄냈다는 평이 많다. 당장 바로크 시대의 바이올린과 활로 시대연주를 하는 음원을 들어보면, 오늘날 연주의 음색과 많은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소리의 크기, 명확성, 관통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바이올린 역사에서 투르트의 활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다는 평이다. 오늘날에도 르 준 투르트의 활은 바이올린 활에 있어 '스트라디바리우스', '과르네리' 이상의 호평을 받는다. 지난 2018년 12월 경매에서 르 준 투르트 활이 36만7862달러(한화 4억50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도미니크 페캇 (1810 - 1874) 


도미니크 페캇 바이올린 활

 

 1800년대 바이올린 활 제작 황금기를 연 또다른 제작자는 도미니크 페캇(Dominique Peccatte)이다. 페캇은 1810년 프랑스 바이올린 제작지역으로 유명한 Mirecourt(미흐뚜흐)에서 태어났다. 


 페캇의 첫번째 직업은 미용사 견습생이었다. 페캇은 손재주가 뛰어났는지 니콜라스 뷔욤(Nicolas François Vuillaume)의 추천으로 니콜라스의 형인 장 밥티스트 뷔욤(Jean-Baptiste Vuillaume) 밑에서 1826년부터 일하게 됐다. 


 뷔욤의 공방에서 활 제작을 배운 페캇은 1836년부터 프랑수와 루포(François Lupot II) 밑에서 일했고, 루포가 사망한 이후에는 그의 작업실을 물려받아 독립 제작자로 활동했다. 페캇은 뷔욤 공방 시절부터 파리에 거주했으나, 1847년에는 고향인 미흐뚜흐에 돌아와 사망 2년전인 1872년까지 활을 만들었다.


 페캇은 투르트 활을 더욱 발전시켰다. 페캇은 투르트 활의 '도끼모양' 헤드를 자신의 활에도 적용하는 등 투르트 스타일을 혼합해 자신만의 다양한 바이올린 활을 제작했다. 


 페캇은 초창기에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 하지 않고 'Vuillaume à Paris'라는 상표를 새기거나, 스탬프를 아예 찍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성숙기에는 'PECCATTE'이라는 스탬프를 사용했다.


 페캇이 제작한 첼로 활이 지난 2018년 경매에서 22만4648달러(한화 2억60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페캇의 유명한 제자로는 Joseph Henry와 Pierre Simon이 있다. 또한 바이올린 활 제작가문인 바장 가문의 1세대인 프랑수와 바장(François Xavier Bazin)을 가르쳤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페캇의 형제인 프랑수와 페캇(François Peccatte)과 조카 샤를 페캇(Charles Peccatte)도 뛰어난 활 제작자로 알려져 있다.



■외젠 사토리 (1871 – 1946)


외젠 사토리 바이올린 활


 19세기 최고의 활 제작자가 '르 준' 투르트와 도미니크 페캇이라면 20세기 최고의 활 제작자는 외젠 사토리(Eugène Nicolas Sartory)라고 할 수 있다. 


  E. 사토리는 프랑스 미흐뚜흐에서 아버지 밑에서 활 제작을 배웠고, 파리로 건너가 도미니크 페캇의 조카인 샤를 페캇과 알프레드 라미(Alfred Lamy) 밑에서 일했다. 사토리는 어렸을 때 부터 뛰어난 실력을 지녔는지 그의 나이 18세인 1889년부터 자신의 작업장을 차렸고, 1910년부터는 유명 제작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사토리 활은 페캇과 라미의 영향을 받았으며, 헤드 부분이 더 넓고 무거운 점이 특징이다. 활대 역시 둥근(round) 형태는 물론 팔각(octagonal) 형태로 제작하는 것을 선호했다.


외젠 니콜라스 사토리


 사토리 활이 특히 유명해 진 계기는 벨기에의 바이올린 거장 외젠 이자이(Eugène Ysaÿe)가 후원하면서다. 물론 이자이는 사토리 활만 쓴 것은 아니고, 투르트 활을 사용하기도 했다.


 유명세를 얻은 사토리는 루이 모리조(Louis Morizo), 루이 질레(Louis Gillet), 쥘 페티크(Jules Fétique) 등을 제자로 삼아 자신만의 스타일을 퍼트렸다. 대규모로 생산되어서 그런지 '르 준' 투르트나 도미니크 페캇의 활에 비해 사토리 활은 더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글을 쓰는 나도 최근 송우무역이 주관한 J&A Beare 현악기 전시회에서 E. 사토리 활을 시연해볼 기회를 가졌다. 비교적 가벼운 올드활에 비해 적당한 무게감이 주는 손맛이 아직도 기억난다.


 오늘날 사토리 활은 다른 활보다 특히 '짭퉁'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짭퉁이라고 폄하하긴 좀 그렇고, 사토리 스타일을 모방한 레플리카에 가깝겠지만. 이같은 레플리카는 스탬프조차 사토리 활의 특유의 각인인 'E. Sartory à Paris'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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