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님의 카드 한도는

퇴사자의 카드 한도 금액

by 김시산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퇴사를 결심하기 오래 전부터 세워둔 여행 계획이었다. 퇴사를 고민하는 시간과 퇴사 후의 생활에 몸을 적응시키는 지난한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그 계획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마침코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내가 다가갔다. 회사를 다닐 때와 아닐 때 여행을 준비하는데는 큰 차이가 없었다. 여행 기간을 정하고 날짜별로 갈 곳을 검색하고 미리 해야 할 예약을 하고, 동선에 맞는 숙소를 정하는 것. 아주 순조로웠다. 여행을 가면 늘 현찰을 사용하지만, 현장 결제를 해야 하는 숙소비나 현찰이 부족할 상황을 대비해서 해외에서 사용이 가능한 신용카드를 늘 챙겨가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퇴사를 앞두고 가지고 있던 모든 신용카드를 해지했기 때문에 가져갈 수 있는게 없었다. 모든 이라고 하기엔 옹색하게 1장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 마저도 정해진 규모에서 소비를 해야 한다는 결심으로 해지했기 때문에 사용 불가능한 실물만 서랍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혹시 모른다는 마음으로, 필요한 것이 없어서 불편해지는 상황을 불편해하는 성격 탓에 빼곡하게 가방을 채우는 성격상 신용카드이 없는 건 불안해서 급히 만들었다. 출발일까지 근무일로 4일 남은 상황이어서 제 때 배송이 될까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2일만에 왔다. 투명해서 앞뒤가 훤히 비치는 카드라니, 다양하고 기발한 디자인이 카드 혜택만큼 중요한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동봉된 카드 정보를 읽었다. 결제일 15일, 카드 한도 70만원.


여행지의 풍경이 낯설 때 우리는 잠시 멈추게 되고 가만히 그 풍경을 바라본다.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시간일 벌기 위함일텐데, 카드 한도 금액을 보는 내가 꼭 그랬다. 이런 한도 금액은 처음 보는데, 이건 뭘까 하는 생각에 잠시 멈췄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로 여러번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은행을 다니던 친구들의 권유로, 현명한 소비를 목표로 카드를 만들곤 했었는데 개설한 이유는 다양했지만 신용카드 한도는 널뛰지 않고 일정했다. 자동으로 수백만원으로 맞춰서 개설된 한도를 꽉 채워서 써 본 적이 드물기에 한도를 신경쓰거나 염려해본 적도 없다.

현재의 나는 무직인 신분이라 카드사에서는 대금 납입 능력을 현저하게 낮게 판단하고 한도를 낮게 설정했을 것이다. 그 동안 가장 크게 변화를 느끼는 지점은 공간이었다. 매일 출근하던 곳이 이제는 없다는 변화가 크게 와닿았고 나머지의 일상은 그대로였는데, 이번 카드 한도를 보고 나에 대한 설명이 많이 달라졌음을 발견하게 됐다. 나는 70만원 정도의 소비 여력이 있는 사람으로 설명된다.



사회에 진입하고,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을 설명하는 방법이 이전과는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됐다. 서술형에서 객관식 단답형으로 바뀌었다는 것. 어릴 때 우리는 누군가를 특징이나 인상으로 소개를 했었다. 말을 재밌게 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아이, 노래를 잘 부르는 친구처럼,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운 주관적인 감상으로 설명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한번에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일정한 틀로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다니는 회사는 어디이고 연봉은 대략 이 정도이고, 사는 동네는 어디쯤이다, 타고 다니는 차는 무엇이며 키는 몇 센치미터인지. 듣는 순간 우리들의 머릿 속 어딘가에 있는, 부인하면서 동시에 시인하는 어떤 틀에 끼워 넣는다.


신용카드 한도 70만원이 어떤 의미인지 일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그리고 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숫자가 클수록 더 잘 살아내고 있는 사람으로 이해된다. 카드 한도를 포함해 회사의 인지도, 연봉, 키, 집 평수 등. 최근에 회사를 다닐 때 업무로 알게 된 한 강사님께서 연락을 해오셨다. 곧 책을 출간하실 예정이라며 추천사를 써줄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함께 한 일에서 나도 큰 도움을 받았기에 때문에 흔쾌히 써드릴 의향이 있었으나, 우선 현재 상황을 알리는 게 우선일 것 같아 퇴사한 상태임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하다는 답장을 보내셨다.

새 책에 들어갈 추천사에는 재직했던 회사의 인지도가 필요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세상에 나올 새 책의 홍보와 신뢰도가 너무 중요한데 거기에 유명한 회사의 이름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에 매우 이해가 되는 대목이며 나 역시 책을 낸다면 추천사에 그런 힘을 싣고 싶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상황을 내가 필요없어짐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당연한 선택으로 이해했다. 다시금 일정한 틀로 설명하려는 이 사회의 원리를 피부로 체감했다.



현재 나는 여행을 무사히 잘 다녀왔고, 계속 글을 쓰고 있다. 카드 한도로 볼 때 나는 경제적 능력과 생산성이 낮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속한 회사, 카드 한도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할 때 의미를 가진다는 깨달음과 함께. 누군가에게 나를 설명해야 하는 생활, 타인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상이 불필요하다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데 피할 수 없으며 필요하기도 하다. 일정한 틀 안에서 더 나은, 더 높은 설명의 소재를 쫓는 삶도 의미가 있다. 다만 외부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삶을 쫓는 대신 자신의 내부의 소리를 듣고 따라가 그 소리가 하는 말을 잘 이해했고 따라 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삶을 구성하는 것도, 살아가는 방식 중에 하나일 수 있다.


그 과정이 미지의 여행지로 떠나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덜 불안하고 싶어서 많은 정보를 얻어서 가급적 안전하게 지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낯선 언어들이라 잘 알아듣지 못할 우려도 많다. 외롭기도 할 것이다. 익숙한 외부의 설명의 틀에 날 맞추는 게 쉬워 보인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혼자인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시간 역시 비례해서 길어진다.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왜 여행하는 중이야, 지금 뭐하는거야, 뭐가 하고 싶은거야 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들. 선뜻 답하기 어려운 대답들. 그래서 다시 길어지는 시간. 하지만 우리가 신용카드를 발급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까지의 시간, 그 한도를 넉넉하게 받는데 걸리는 시간을 떠올려보면 이렇게 길어지는 시간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글을 쓰면서 이전과 달리 나 스스로 일치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유명한 직장, 그럴싸한 연봉은 없지만 내면이 더욱 단단해졌다는 느낌. 외부의 설명으로 설명되지 않던 나 자신을 이제는 이전보다는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더 발견할 게 될지 낯설어 질지, 가봐야 알 것이다. 간다는 사실이 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줬다. 그래서 나는 계속 갈 것이다. 어떤 변화도 설사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도, 예전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어 있을 것이란 기대가 든다. 여행을 가기 전과 돌아온 내가 조금은 달라져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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