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많이 다녔어요?"
퇴사 이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겠다라는 기대감과 많이 다녀왔을 것이라는 당연한 추측이 가득 담긴 질문. 만일 내가 여전히 직장인으로 퇴사한 지인을 만났다면 나 또한 똑같은 질문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을 것이다. '이제부터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직장인에게 여행은 모두가 갈망하는 어떤 것이다. 언제든 하고 싶고 기회만 있다면 해버리고 싶은 무엇. 그런 의미에서 사표와 비슷해지기도 한다. 안주머니에 사표를 품고 있다면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것은 바로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인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어'다. 1년 전부터 휴가 계획을 세우고 비행기 티켓을 예매할 때마다 늘 아쉬운 점이 바로 시간이다. 개인 연차라는 상품권으로 시간을 사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상품권이다 보니 사용하려면 따라야 할 약관이 많다.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에 대한 미안함, 눈치, 일에 대한 책임감 등. 일일이 읽고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런 약관의 내용들이 있다. 그런 약관을 준수하기 때문에 하루만 더 있으면 딱 좋다고 하면서 그 하루를 더 연장하지 않는 마음, 아침 비행기로 한국에 도착해서 바로 출근하겠다는 놀라운 결심들이 나오게 된다. 일을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하니 이제는 시간이 사라지는 현상, 이쯤되면 여행은 단순히 훌쩍 떠난다의 기계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시간의 가치와 활용에 가닿게 된다.
직장인이 된 후 1년차 때부터 꼬박꼬박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받는 예약 확인증과 주고 받는 메일 등을 여행시기와 여행지별 메일함을 만들어 분류해두었다. 그래서 언제 어디로 여행을 갔는지 알 수 있는데, 매년 한 차례, 많게는 세 차례까지 다녔고 장소도 다양하다. 가깝게는 제주도와 오사카, 삿포로 같은 일본, 멀리는 영국섬의 북쪽 끝까지, 세계 각지. 가끔 메일함을 한번씩 열어보면서 그 때의 기억을 되새겨 보곤 하는데, 새로운 여행지를 간다는 설레임과 낯선 곳의 풍경들 속에서의 만끽한 즐거움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러면서 한해도 빠짐없이 연도가 기재되어 있는 메일함 이름을 보면서 어쩌면 의무감을 가지고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을 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회사에서 가장 많이 나눴던 대화의 주제는 휴가와 여행이었다. 올해 휴가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그 나라는 뭐가 유명해요?, 거기 가봤는데 너무 좋아요와 같은 대화들. 나를 비롯한 동료들 그리고 보통의 직장인들이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처럼 개걸스럽게 이 주제를 먹어치우곤 했었다.
직장인들은 여행을 왜그리 좋아하는 걸까. 어쩌면 목을 멘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을 정도로 여행에 집착한다. 여행 그 자체는 이미 경험과 정서 측면에서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취미이다. 그래서 직장인에게도 휴가는 곧 여행으로 통할 정도로 스테디 셀러로 자리매김했다. 다만 그 의미가 좀 남다를 뿐.
여행을 떠나면 익숙했던 많은 것들로부터 떨어져 거리를 두게 된다. 회사와 멀어지고 직책에서 오는 책임감에도 벗어난다. 출근 시간, 점심 시간, 퇴근할 때는 모두에게 인사하기와 같은 매일 같이 지켜야 했던 일상의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견뎌야 했던 많은 것들로부터 이탈해 굉장히 홀가분한 환경에 놓이게 된다. 휴가이자 여행의 묘미인데 이 참맛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회사와 휴가의 관계성 때문이다. 회사와 휴가는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작용한다. 마치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처럼. 회사가 점점 더 힘들어 질 때 휴가를 가고 싶은 욕구는 더 커진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짐을 싸고 떠남으로써, 일상의 모든 책임과 규칙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분리되고 싶어 한다.
"아니요, 여행 한번도 안갔어요"
나는 퇴사한 이후에 여행을 다니지 않았다. 여행을 생각해보긴 했으나 직장인일때처럼 반드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퇴사 후 남미 여행, 순례길 걷기, 외국에서 한달살기 같은 콘텐츠에 많이 노출됐지만 나도 해봐야겠다는 결심까지 이어지지 않았고 나는 내 일상에서, 서울에서 하고 싶었던 공부와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행을 다녔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왜 여행을 가지 않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곤 했고 그 대답으로 효능감이 튀어나왔다. 더 정확히는 주어진 시간을 만족스럽게 쓰고 있기 때문. 이라는 대답.
우리는 분리가 되고 싶어서 휴가를 가고 여행을 떠난다. 현재로부터 분리가 되고 싶다는 것,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현재가 불만족스럽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이 힘들거나 회사가 맞지 않다거나 등 갖은 사유로, 내가 시간을 쓰고 있는 지금이 아깝다는 생각. 그래서 나는 온전히 내가 원하는대로 구성하고 배치할 수 있는 휴가를 떠난다. 휴가는 불만족스러운 현재와 달라야 한다. 의미있게 보내야 하고 만족스러워야 한다. 1주일 혹은 길게는 2주일 내에 의미와 만족을 경험할 수 있는 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을 떠난다. 정해진 기간 내에 본 것, 한 것, 먹은 것이 손에 잡히는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되었던 효능감을 충분하게 느끼게 해준다.
반대로 자신의 시간을 만족스럽게 사용한다면 휴가나 여행이 유일한 답이 아니게 된다. 퇴사 후 나의 시간을 나를 위해서 사용하게 되면서 책임감과 동시에 부담감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만족감 역시 매우 커졌다. 그래서 퇴사를 해서 시간이 났으니 여행을 많이 다닐 거란 예상이 내겐 적용되지 않았다. 여행보다 더 큰 효능감을 주는 일들로 하루를 채우고 있기 때문에.
회사에 다니면서도 일을 정말 즐겁게 하는 동료를 본 적이 있다. 일에서 오는 성취감은 물론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마저 즐기면서 엄청나게 몰입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가장 부러웠던 점은 좋아하는 일을 나보다 빨리 찾았다는 사실이었다. 매일, 일을 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가는게 아까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을 아껴쓸 줄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많은 많이 돌아보게 됐다. 이러한 목격들이 쌓이고 쌓여 퇴사라는 결심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퇴사 후 나는 글을 쓰면서 2~3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 경험을 여러 차례하고 있다. 심지어 허기도 많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이 너무 빨라서 조바심을 느끼고 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시간에 완전히 녹아들어져있고 일상에서 나의 호흡법대로 숨을 쉬고 있다. 수단으로서 여행이 필요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여행을 갈 것이다. 다만 분리를 위해,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여행은 아닐 것이다. 여행을 통해서만 가능한 경험이 있고 그것을 위해 떠날 예정이다. 일상은 일상대로, 여행은 여행대로 의미로울 수 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돌아올 일상에 더 이상 한숨 짓지 않는 나 자신이 이미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