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그대로 믿는 마음

조카를 보면서 느낀 회사원의 태도에 대해

by 김시산

첫 조카 ‘은유’는 태어날 때부터 놀라운 존재였다. 반려동물고 결혼처럼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일은 항상 생경하고 낯선 법이지만, 은유는 ‘아가’라는 점에서 더 달랐다. 복잡한 속내와 내면을 가졌지만 그것을 둘러 싸고 있는 외피가 너무 연약한 존재. 그런 속내를 점점 내보이고 외피가 단단해지는 과정, 내면과 외부가 균형이 서서히 맞춰지는 과정은 성장하는 아이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첫 만남은 설레임 가득이었다. 오죽하면 은유를 처음 만나는 날에 새 옷을 입고 갔을까. 아내와 커플로 사둔 셋업을 처음 입은 날이다. 입고 갈래?라고 묻는데 당연히 그래! 라고 했다. 은유는 아직 눈도 뜨기 전인데. 아가가 눈을 뜨고 사람을 인식하는데 몇 주가 걸린다는 건 더더욱 몰랐다.

시간을 조금 더 앞으로 돌리면, 은유가 형수님의 뱃 속에 있을 때는 실감이 잘 안됐다. 어른들이 ‘첫 조카는 자기 자식보다 예쁘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긴 했지만 매사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는 천성 탓인지 무사히 잘 태어나길 바랄 뿐이었다. 지하철 임산부 보호석에 앉아 있는 남자 탓에 출근길 내내 서 있어야 했다는 만삭의 형수님 얘길 듣고 같이 분노했던 정도로, 기대감보다는 안전에 대한 걱정이 더 컸기도 했다.

조카가 무사히 태어나고 형은 아빠가 되고 나는 자연스럽게 ‘작은 아빠’가 됐다. 나는 작은 아빠가 없었던 관계로 역할에 대한 숙지를 못한 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빠보다 작지만 조카보다는 큰, 그리고 이미 다 자란 사람으로 조카와 함께 크는 사람은 아닌 사람. 아무튼 은유에겐 아빠와 비슷한 존재이지만 그 보단 늘 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항상 내 눈엔 사랑스럽지만 아빠가 혼을 내고 있으면 침묵하는 사람이면서 아빠가 없을 땐 아빠 역할을 대신 하는 사람. 너무 당연한거지만 괜히 그런 사명감을 가졌었다.

나의 결심에 호응하듯 은유와 함께하는 시간은 자주 놀라웠다. 책에 펜을 가져다 대면 말을 하는 ‘세이팬’이라는 걸 알게 됐고 감기에 걸려 눈물과 콧물 범벅인 채로 지치지도 않고 기어서 계속 오가는 ‘국민 아기 대문’의 위력이 놀라웠다. 내 시절의 꾸러기 특공대 정도로 생각했던 ‘티니핑’은 탄생 속도가 너무 빨랐다. 여전히 하츄핑 밖에 모르고 있어서 은유가 답답해하는 것 같다. 장난감 같은 어떤 도구를 통해서 이 아이의 속내를 짐작해볼 뿐이었다.


은유는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지 않았다. 모든 걸 일단 만져보고 보여주고 해보면서 나의 반응을 살폈다. 이 아이의 세상에서 위험은 배워야 하는 감정인가, 배우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다. 그날도 처음보는 장난감책을 마구 만지며 놀고 있었는데 은유가 갑자기 “짜아빠” 하고 나를 불렀다. 내가 놀라서 뭐라그랬어? 다시 말해줄래? 라고 하니 그게 뭐가 놀랄 일이냐며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 아직 내 사진첩에 남아있다. 금방 본인이 하고 싶은 말로 넘어갔지만 그동안 말을 하지 못했을 뿐 저 작은 머리 안에서, 하고 싶은게 많은 마음 속에서 ‘짜아빠’란 말이 맴돌았겠지, 나라는 사람을 부르기 위해서는 짜아빠란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 이런 시간이 쌓이고 쌓여 말로 튀어나왔다고 생각하니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등학생이 된 조카는 제법 어린이 티가 난다. 마냥 연약한 아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외면이 단단해지면서 속내를 드러내는 일도 많이 익숙해진 것 같다. 뭉툭한 말 대신 하고 싶은 말 대신에 차분히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젠 친구로 지내자’며 남자친구에게 성숙한 헤어짐의 인사말을 전하는 아이, 핫팩을 쥐어 주면 손등도 덮힐 줄 아는 아이. 있었던 일을 나에게 늘어놓을 때마다 이 아이의 세계는 방문이 여러개 있는 집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방과 저 방을 오가며 하루를 보내고 나올 때는 문을 꼭 닫고.

얼마 전에 영어 학원에서 단어 시험을 봤고 꽤 많이 틀리는 바람에 형수님이 속상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어김없이 그런 은유가 귀여웠지만 조용히 하고 있었는데 놀라운건 은유의 태도였다. 특유의 귀여운 표정을 하고 “은유야 다시 생각해봐”, “은유야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봐봐” 라며 선생님이 한 얘기를 그대로 따라했다. 그리고 이내 뛰어 다니며 놀이터를 활보했다. 보통 지적을 당하면 주눅이 들고 침울해지기 마련이고 그 얘기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법인데, 은유는 그렇지 않았다. 그 짧은 찰나에 학원 문을 열었다가 닫은 것이다. 지금은 짜아빠와 노는 문을 연 상태니까. 어쩌면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선생님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런 조카의 태도를 보면서 좀처럼 사람을 어른의 태도가 생각났다. 특히 동료, 상사와의 대화, 행동을 제대로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직장인의 모습이 더 생각났달까. 회사에선 많은 이야기를 하거나 듣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애쓴다. 좋은 얘기를 듣더라도 ‘이게 전부가 아닐거야’ 혹은 ‘이건 잠시일 뿐이고 계속 잘해야 해’ 같은 자기 검열을 하기 일쑤다. 그런데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면 그 여파는 오래 간다. 앵커링 효과라는 말처럼 나를 보는 기준이 잘못 꿰어져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계속 들기 때문이다. ‘너 요즘 말나와’,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얘긴데’ 같은 말들이 세대를 이어오면서 계속 소비되는 것도 하나의 표상이지 않을까. 좋은 말이든 좋지 않은 말이든 그 말을 들은 시간의 문을 닫고 나와야 하는데, 진짜 마음은 다를 거라는 의심이 들면 그 문은 닫히지 않는다.


회사는 항상 내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시스템이나 구조를 통해 직원들이 잘 하도록 독려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평가나 보상의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건 이미 증명이 되었고 결국 직원들의 선의와 열의가 주요 레버가 되는데, 정작 직원들이 선의를 의심하기 때문에 좋은 말과 좋지 않은 말이 나간다. 이것을 들은 직원들은 다시 좋은말과 좋지 않은 말의 진의에 대해 의심하고, 결국 회사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보이는 말을 믿지 못하고 그 뒤에 있을 ‘무엇’에 더 집중하게 과정이 반복된다. 복잡한 속내가 아직 더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의 외피는 너무나 단단한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그대로 믿으라고 말하기 어려운 사회가 되긴 했다. 오히려 순진한 발상일수도 있다. ‘눈치껏 잘하는’게 미덕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무례하다고 인상을 주는 회사에서, 보이는 것만을 믿는 게 오히려 더 어렵고 불이익으로 돌아오기 쉽상이다. 조직 전체에 문화로 정착되어있지 않은 이상, 나만 드러난 것만 믿는 행동은 오히려 튀는 사람이 될테니까.

다만, 한번쯤은 보이는 것 이면의 무엇을 생각하기 위해 쓰는 시간이, 에너지가 얼마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가지면 어떨까. 예를 들어, 알아서 잘해주면 좋겠는데, 이 정도만 말해도 딱 알아들으면 좋겠는데 처럼 숨기는 말들과 혹여나 상처가 될까봐 가리는 말들이 가지는 비효율에 대해서. 숨겨지거나 가려지는 바람에 수신자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또 그것을 또 봐야만 하는 입장에서의 정신적, 감정적 소비도 상당한 비용에 해당한다. 일상적으로 해오던 일이지만 일상적이기 때문에 그 비용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직장인일 때는 이 점을 굉장히 큰 비용이라고 생각했고 꽤 많은 피로를 주었다. 원래 잡혀 있어서 매년 집행해오던 예산을 깎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아낄 수 있는 건 아껴야 회사도 사람도 견실해질 수 있다는 건 너무 당연한다. 서로가 보이는 것만 믿는 구조, 저의를 의심하는 사람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구조 나아가 말과 행동을 반대로 하는 구성원이 불이익을 받는 구조.


내가 마지막으로 일했던 Toss에서는 피드백 문화가 상당히 발전해있다. 다른 국내 기업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 정도로 Radical Candor(잔인할 정도로 솔직하게)를 지향하고 있고 구현이 돼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대의 퍼포먼스, 태도 등에 대해 가감없이 의견을 전달한다. 일반 회사에서는 소위 말하는 ‘관계가 틀어질까봐’, ‘어색해질까봐’ 삼가는 피드백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가능한 저변에는 3가지 전제가 있다. 1)(발신자)동료가 잘 되길 바란다는 마음에서 피드백한다 2) (수신자)동료는 내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피드백을 준다 3)명쾌하고 정확한 워딩을 사용한다. 1)과 2)은 원숙한 속내를 가진 어른의 태도를 기대하는 것이고, 3)은 보이는 그대로 믿을 수 있게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료가 정말 잘되길 바란다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또 진심과 애정 어린 마음으로 한다면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칙으로 배웠다. 듣는 입장에서는 들은 그대로만 행동하면 되니 이보다 더 깔끔하고 효율적일 수가 없다.

우리는 내부와 외면의 균형을 맞추는 과정을 치열하게 거쳐서 속내를 다듬어 꺼낼 줄 아는 사람이 됐다. 누군가 좋은 말, 좋지 않은 말을 꺼냈다면 그것은 이미 복잡다다한 속에서 숙성된 후에 나온 말일테니, 오히려 그대로 믿어도 되는 것 아닐까. 물론 발화자는 듣는 사람이 그대로 믿어도 될 말을 꺼내고 본인 또한 말한 그대로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갭이어를 하면서 가장 큰 만족이 이 지점이다. 외부 자극이 없고, 더 많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 이 점이 회사 뿐만 아니라 어느 관계망이든, 적절히 구현된다면 사람들의 피로는 확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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