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피부양자입니다.

떠오르고 있어요

by 김시산

영화 <좀비딸>을 보고 왔다. 제목부터 재미있다. 웹툰이 원작이고 정식 명칭은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인데, 줄여서 좀비딸로 부른다고 한다. 의미를 선뜻 파악하기 힘든 구조여야 하는데 전달이 잘되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미라아들'이라고 하면 미라의 아들인지 미라인 아들인지 헷갈리는데 좀비딸에는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보통의 좀비라면 제거할 대상이지만 좀비가 된 딸을 그 위기로부터 구해내는 아버지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무척 재미있게 봤다. 한국형 신파, 지겹다고들 하지만 요즘 세태인 오히려 신선한 문법으로 다가왔다. 영화 소재의 면에서 진정한 인간의 본성은 극한의 상황에서 표출된다는 믿음 하에 그런 배경과 장치를 뺴곡하게 채워 몰아 붙이는 콘텐츠들이 많고 또 그런 배역을 잘 소화해내야 연기력이 있는 배우로 간주하는 출연의 면, 이 양면에 껴서 많이 지친 상태였다. 쉽게 말해 자극에 구멍이 송송 뚫린 눈과 뇌를 이제 그만 쉬게 해주고 싶었고 그 때 <좀비딸>을 만났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좀비인 딸과 아빠의 관계다. 영화에서 좀비딸이 사람일 때의 기억을 하나씩 다시 떠올리면서 "아..ㅃ..ㅏ.."를 찾는데, 사실 삼촌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삼촌이 누나의 딸을 어릴 때부터 부양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조카와 삼촌의 관계였다. 어느 날 갑자기 딸이 생겼고 아빠의 역할을 해온 삼촌, 나아가 절대적 타자, 응답이 곧 파멸을 일으키는 좀비가 된 딸을 다시 이성적인 질서로 복귀시키려 적극적인 개입을 하는 삼촌이다. 보면서 나의 조카가 떠올랐다. 만약 나라면 조카를 자식처럼 부양하며 아빠로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도.


그러나 내가 지금 피부양자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피부양자로 전환되었다. 건강보험가입자의 종류는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입자는 보험의 적용을 받는 '피보험자'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처럼 퇴사를 한 경우에는 지역가입자 혹은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가 될 수 있는데, 나는 보험료가 0원인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전환했다. 사전적 정의는 피보험자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가족이다. 그러니 나 역시 나의 가족에게 생계를 의존하고 있으니, 좀비딸에 대한 이입은 조카에 대한 내 사랑의 크기를 가늠해보는 데서 멈췄다.

건강보험관리공단에 전화를 해서 관련해 질의를 드리면서 처음으로 피부양자라는 단어를 실감하게 됐다. 부양을 당하는 자가 되다니. 대학생, 아르바이트, 직장인 등 돈을 버는 경험에 따라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 각종 기금 시스템에서의 나의 지위도 변화해왔다. 하지만 한국의 시스템이 워낙 잘 갖추어져 있는 탓에 유려하게, 일사분란하게 적용되어 온 것이다. 당사자가 인지하지 않아도.

기약이 없는 직장가입자 지위에서의 이탈은 처음인데 그대로 이어서 고스란히 부양 당하는 자가 되다니. 활발히 활동하면서 경제력과 생산성이라는 지표를 도그마로 받들고 살아온 30대 중반의 한국 남성에겐, 다시 적응이 필요한 개념일 수 밖에. 그렇게 피부양자가 됐다.


최근 MBC의 예능 <나 혼자 산다>에 박천휴 작가가 나왔다. 아주 흥미롭게 봤는데, 뉴욕이라는 도시가 가진 관대함이 인상적이었다. 박천휴 작가는 대략 한국 나이로 40대 초반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은 엘레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4층이다. 세탁기가 집에 없어서 걸어서 삼십여분 거리에 있는 코인 세탁소를 자주 방문한다. 지금은 토니상이라는 큰 상을 받아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이전, 그러니까 명성을 얻기 전으로 돌아가보자. 4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 어떤 남성이 있다. 글을 계속 쓰고 있고 조금씩 팔리지만 아직 미혼에 세탁기가 없는 집에 살고 있다. 심지어 원룸을 벗어나 방이 분리 되어 있는 집을 살기 시작한지도 얼마 안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그마로 보면, 그는 아마도 사회가 요구를 쫓아가지 못하는 상태가 아닐까. 그런데 뉴욕은 기다려준다. 자본주의 첨단에 있어서 과당경쟁과 승자독식이 일상인 곳이지만 동시에 다양성의 메카이기도 하니까. 인종, 직업 등 삶의 양식이 다채롭고 동시에 그 누구의 삶도 인정 받는 곳이다. "뉴욕은 제 정체성인 것 같아요"라고 말한 그의 인터뷰에서 오늘날의 박천휴 작가가 탄생하기까지 꽤 긴 시간 동안, 매진할 수 있었던 토양이 되어주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여기는 뉴욕이 아니다. 한국이다. 나는 지표를 달성할 수 없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 시간 동안 가족에게 나를 의탁하고 있다. 몇달이 됐지만 아직 많이 낯선 경험이다. 다시 지표의 세계로 나를 자꾸만 끌어 당기는 느낌도 받는다. 관성이겠다. 저쪽 세계에서 십년 넘게 살았으니, 내 삶의 방정식은 저쪽 세계에서 더 잘 그리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건 너무 당연하다.

그리고 이 적응의 낯섦에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 내가 있을 자리를 박차고 새로운 자리를 찾겠다는 시도 내지 욕심이 만든 영향권 아래에 놓였다. 오로지 나의 선택으로 인한 변화와 불편함 등을 가족이 온전히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떠받치고 있다. 여긴 뉴욕 같지 않아서 자칫하면 가라앉을 수 있는 내가, 가라앉지 않도록 그리고 오직 관성에 이끌려 원래 세계로 홀라당 넘어가지 않도록, 그래서 어느 방향이더라도 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내 생활과 미래를.

여기를 뉴욕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래서 피부양자에서 부양이, 부양(扶養)이 아니라 부양(浮揚). 나는 떠오르고 있다. 훨훨 날아올라야지. 떠오른 기분은 어색하고 불안정할 수 밖에 없지만 적응해내고 이 시간을 귀하게 쓰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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