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6개월차의 소회
회사를 그만 둔지 6개월이 되었다. 다이어리와 일기를 다시 펼쳐 보면 그간 한 일들과 고민들이 보인다. 생생하다. 그리고 그 기록들이 꽉 붙잡고 있어서 곳곳에 잔뜩 껴 있는 안개들이 있다. 바로 만족감. 산문을 써오면서 여러 차례 피력했었다. 나의 시간을 나의 의지대로 배치하고 구성하는 일에 대해서.
그 사이에는 기업들로부터 받은 제안, 소위 말하는 오퍼들에 대한 기록도 있다. 나의 이력이 채워야 하는 포지션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제안을 보낸 여러 회사들이 있었다. 직장에 꽤 오랜 기간 몸을 담았던 사람으로서
경력 공백기를 가지고 있는 무직자에게 제안을 한다는 건 기업 입장에서도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회사의 명성이나 규모와 관계없이 매우 감사하다.
오늘을 기준으로 퇴사 기간을 1차-2차-3차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1차는 ~2개월차, 2차는 ~4개월차, 3차는 6개월차가 된다. 1차 기간엔 오퍼가 오면 내용을 세심하게 들여다봤었다. 아직 회사원으로서의 자아가 강했던 시기였다. 재직과 이직 두가지 선택지가 익숙하고 그게 전부인 양 살았었으니까. 세심하게 들여다볼 때도 최근에 재직했던 회사와 상당히 많이 비교를 했었다. 커리어라는 것은 퇴사하기까지 점층적으로 쌓아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나은 회사 혹은 직무값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동시에 이 기간에는 퇴사자로서의 루틴을 잡아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난 한겨울에 손을 내놓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었던 일에 진입하는 단계였고 그 일을 하기 위한 신체를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늦게 일어나보고, 중간에 달리기를 했다가 밤으로 바꿨다가, 이 책을 읽었다가 저 강의를 들었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실패와 알아차림이 교차하면서 나의 시간을 지배했었다. 해 나가야 할 것이 구조물로 손에 감각되지 않던 시기. 그래서 잡히는대로 해보았던 때, 거기에 회사들의 오퍼가 포함돼있었다.
2차 기간에도 오퍼는 간간이 들어오고 있었다. 다만 감각되는 양상이 조금 달랐다.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해졌고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시점이었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해서 지원했고, 들쭉날쭉하던 글 쓰는 장소는 도서관으로 고정됐다. 그리고 글이 써지든 써지지 않든 매일 글을 쓰는 시간을 정하고 꼬박 채우는 습관도 들였다. 내게 도움이 되는 자료와 책들을 구분하고 리스트업을 해서 차근차근 소화하기도 했다. 1차 기간과는 다르게 꽉 할 일과 진척도가 가시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매일을 생동감있게 보낼 수 있었다.
반대로 이 기간에 들어오는 오퍼들은 내게 실물감이 없었다. 원래 멀티태스킹이 약점이라 어느 하나에 몰두하면 나머지가 배제되고 그래서 놓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해왔는데 오퍼 역시 그랬다. 추위에 내놓았던 손이 따뜻한 물에 갓 담궈져 안온함을 느끼는 시기였다. 온 감각이 서서히 녹아가는 손에 집중돼 자연히 주변 풍경은 흩어졌다.
3차 기간. 여전히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지배적이지만 동시에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됐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글을 쓴다는 건 단기간의 수련을 통해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글은 경험과 치밀한 감각이 필수적인데 이건 수련과 동시에 내밀함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내부에 집중했었고, 찾은 후에는 다시 외부로 시선이 향했었던 것 같다. 빠르게 잘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잘 쓰고 말거라는 외연에 치중된 목표에 집중했던 지난 몇달을 지나 다시 내부를 들여다 봐야 하는 시점에 들어선 것이다. 난 계속 쓰는 사람, 잘 쓰기 보단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수업을 들을 때였다.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사람에겐 스스로를 부양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작가로서 먹고 사는 문제라기보다는, 글을 너무 쓰고 싶은데 쓸 시간이 없을 때의 간절함, 그 간절함이 역력한 상황에서 관찰되는 생생한 풍경을 체감하는 것이 오히려 글 쓰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는 말씀이셨다. 당연히 독자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서 글을 갈고 닦는 수련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반드시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과 함께. 이 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 속의 손만 보다가 고개를 들었고 내가 오히려 좁아지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란 자각이 들었다.
3차 기간에도 오퍼들이 들어왔다. 여전히 들어오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찾고 잘하고 싶어졌고 몰두하는데 시간을 쓰는 나는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문득 이 상태에서 회사를 다닌다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라는 확신에 찬 짐작과 감각이 느껴졌다. 이전엔 나이에 맞춰서,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다녔던 회사. 회사와 돈을 버는 것 자체가 목적인 삶이었다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확고하게 마음 속에 담아둔 내가 회사를 다닌다면 어떨지, 해보기 전까지 알 수 없지만 과정이 달라졌으니 달라진 결과가 나올 것은 너무 자명하다. 최소한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기 위한 경험과 내공을 쌓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그간의 회사와는 다르게 더 몰입하고 충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했다. 다시 회사를 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 좋아하는 일로 나의 시간을 채우면서 고목나무처럼 단단해졌다. 이제는 더 깊게 뿌리 내리고 더 오래 자라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