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와 디지털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맥락형 인간(Contexter)
얼마 전에 2024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가 열렸습니다. 개표결과 미국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가 꽤나 큰 선거인수 차이로 제47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되었네요. (비록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승리한 트럼프 후보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패배한 해리스 후보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건넵니다.
저는 이번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서 유행한 한 인터넷 밈(Meme)을 공유드려볼까 합니다.
지난 5월 해리스 후보(이자 전 부통령)는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히스패닉을 위한 교육 형평성, 우수성, 경제적 기회 향상과 관련한 백악관 이니셔티브’ 행사에서 연설을 하던 중 뜬금없이 ‘코코넛 나무(coconut tree)’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전한 “너희 젊은이들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너희는 코코넛 나무에서 갑자기 떨어진 줄 아느냐. 너희는 너희가 살고 있는, 그리고 너희가 있기 전부터 있었던 맥락 안에 존재하는 거야(You think you just fell out of a coconut tree? You exist in the context of all in which you live and what came before you)“라는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달하며, ”누구도 지하창고에 혼자 살지 않는다“며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해리스 부통령이 이후 조 바이든 대통령을 이어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이 밈은 미국의 유권자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으며, ‘코코넛 나무(coconut tree)’라는 말이 유행어로 되어 인기 역주행을 하게 되죠. 물론 이 이야기를 전할 때 호탕한 웃음을 보인 것이 밈의 원동력이 되긴 했지만, 오늘 저는 코코넛 나무보다 그가 전한 "모든 것은 맥락 안에 존재한다(Everything is in Context)"라는 문장에 더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컨텍스트(Context)라는 말은 맥락 혹은 전후사정으로 번역이 되는 영어 단어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이 영어단어를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데요. 이 Context는 '함께 엮다'는 뜻의 라틴어 contextere(콘텍스테레)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 콘텍스테레는 테피스트리(tapestry, 무늬를 수놓은 벽걸이용 원단)를 만드는 방법을 묘사할 때 쓰이는 용어였다고 하죠. (정교하게 짜여진 카펫 등을 떠올려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컨텍스트(Context, 이하 맥락)는 어떤 상황이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묶인 독특한 구조를 띄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홀로 있거나 무언가의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것은 맥락이 필요 없다는 말이 되겠죠.
고대부터 이어내려 오던 구술적 서사나 문학도 기본적으로 이 맥락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개인이라 할지라도 그 등장인물이 존재하게 된 배경, 줄거리, 주인공의 선택, 관계 모두 무언가와 관계를 맺으며 복잡하게 얽힌 맥락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맥락이 풍성하지 못하면 좋은 이야기가 되지 못하며, 이 맥락이 없으면 우리는 굳이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이유를 찾지도 못하겠죠.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곧 세상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해리스의 어머니가 전달한 말처럼, 우리의 존재는 갑자기 코코넛 나무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이어진 어떤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겠죠.
넷플릭스에서 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나무의 DNA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의 유전자가 들어있다" 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동물과 식물을 나눠서 생각하지만, DNA의 진화 관점에서는 수많은 동물보다 먼저 생긴 나무(Tree)라는 존재가 우리의 선조 격이 되는 것, 혹은 모든 생물체는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처럼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누군가와 그리고 무언가와 관계를 맺고, 서로의 의미를 나누며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황과 관계 안에서 맥락을 찾아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이것을 하나의 중요한 능력으로 향상해야 합니다.
저는 작년 브런치에 ‘이제는 문해력이 아닌 언해력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언어를 해석하는 능력도 광의의 범주에서 봤을 때는 문해력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문자(디지털)와 언어(아날로그)로 나눠서 생각해 본다면) 문자 그 자체의 사전적 의미를 아느냐 모르냐 보다는, 말귀를 알아듣는 능력이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어의 사전적인 뜻은 알면 그만이지만, 말귀는 앞뒤 문맥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지 가능한 것이니 말이죠!
얼마 전에 진행한 강연 Q&A시간에 한 시니어께서 “이제 아랫사람들 눈치와 의중을 살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며 혀를 차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물론 저도 같은 시니어 입장에서 그분이 어떤 맥락으로 그 말씀을 하셨는지는 십분 이해했지만, 애초에 우리는 윗사람 이냐, 아랫사람 이냐에 관계없이 누군가의 생각을 살피는 행동을 기본으로 해야 했던 것 아니었을까요? 그런 원론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면, ‘지금의 어른들이 힘들어졌다’가 아니라 ‘과거에 잠시 임의적으로 편했던 시절이 있었다’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읽은 맥락지능이라는 책(*절판된 책이라서 어렵게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습니다)에서는 지금 21세기에 필요한 능력이 바로 ‘맥락을 읽는 힘’이라고 하며, ‘어떤 상황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변수를 인식한 뒤 여러 행동 방침의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함으로써 행동을 선택하고 실행하는 것”을 맥락지능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러한 의미를 받들어, 저도 기존의 이야기했던 현시대의 아날로그 인간과 디지털 인간의 중간점을 바로 이 ‘맥락형 인간’으로 정의해보고 싶습니다.
먼저, 저는 예전에 에드워드 홀(Edword. T. Hall)『문화를 넘어서』(1976)의 저맥락 문화와 고맥락 문화를 비교하면서, 서양권 문화와 동양권 문화(우리 사회에 해당하는)의 문화적 차이를 설명드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맥락형 인간(편의상 Contexter로 불러볼까 고민입니다)은 그 맥락의 중간에 위치하는 인간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되어 있는 시대에 그 장/단점 모두를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중간에 서는 관점을 넘어서, 21세기의 디지털 세상의 도래와 우리 인간 본연의 아날로그 습성을 함께 이해하고, 그에 따른 여러 행동들을 정확히 맥락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뜻하는 것이죠.
가령, '정(情)'과 ’유연함'으로 대변되는 아날로그 문화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강점이 있지만 원칙이 강조되는 지금의 사회에서는 어쩌면 사회적 병폐를 합당화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진다고 봅니다. 반대로 원칙과 시스템을 강조하는 디지털 문화는 모든 것이 정확하고 명확하지만, 인간이 함께 일할 때 느낄 수 있는 교감, 즉 인간미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론상으로는 모든 것을 딱딱 나눌 수 있는 것 같아도, 인간이 사는 사회와 교감 모두를 수치화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습니다.
최근에 감명 깊게 본 드라마 중에 tvN <감사합니다>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부사장역의 진구 씨가 한 신기술을 발표하는 직원에게 일침을 놓는 장면이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수치로 세상을 나눌 수는 있지만 현장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기술적인 수치로는 따져볼 수 없는 지식을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면서, 모든 것을 원칙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고 하는 대화로써 세부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인간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여전히 쉽지는 않은 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서로 갈등을 중재하고 이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길 중에서 하나임은 분명한 듯합니다.
아~! 그리고 제 글의 맥락이 마음에 드시는 분이 혹시 계시다면, 제가 올린 다음 브런치글을 한 번만 봐주시면 감사합니다^^
오늘도 전후사정에 문제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