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High)맥락 문화'에서 '저(Low)맥락 문화'로의 이동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서는 위와 같은 말이 있죠.
왜 한국말은 굳이 끝까지 들어봐야 할까요? 아마도 그것은 끝까지 듣고 전반적인 맥락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를 가장 잘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예로, 김소월 시인의 시 ≪진달래꽃≫을 들 수 있겠네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라면서 깔끔하게 누군가를 쿨하게 보낼 것 같은 느낌으로 시작하지만, 실은 '(속으로는) 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애이불비(哀而不悲)를 의미하는 것이죠. 즉, '반어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꼭 진달래꽃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많은 가요들도 이러한 흐름을 즐겨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최신 인기곡인 가수 박재정 씨의 <헤어지자 말해요>와 같은 경우도 이와 비슷한 흐름입니다.
"(1절)거짓말+(2절)거짓말+(후렴구)진심" 뭐, 이런 흐름이라고 할까요?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헤어지자 말해주셈 → 사실 구라였고,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죽겠어"
사실, 25년 전, H.O.T의 <캔디>도 이와 비슷한 흐름이죠, 이런 흐름의 한국 노래를 찾긴 너무도 쉬워요.
우리나라 속담 중에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자성어 ‘우물현답’과는 약간 다르게, 언어소통에 있어서 말하는 자(화자)와 듣는 자(청자)가 상호 교감을 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상사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능력은 지금까지 직장인이 필수로 갖춰야 할 (비공식적인) 업무 스킬에 해당했습니다. 부정확하고 맥락에 약간 어긋나고 애매모호한 상사의 지시 혹은 평소 대화에서도 알아서 그 뜻을 캐치하고, 실현해 나가는 것이 직장생활을 평탄대로 로 만들어 줄 센스 같은 것이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지털의 사고방식을 가진 ‘AI인간’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일상적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 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에서 오타를 입력하거나 수식에 맞지 않는 명령어를 입력하거나 오류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AI인간에게 자연스럽게 기대되는 모습은 ‘개떡같이 말하면 그대로 개떡 같이 이해하는 모습’이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성세대 상사가 “이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개떡같이 말하는데 찰떡같이 알아듣나요? 장난하세요?”라는 항의성 대답이 돌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Hall)은 1976년 자신의 저서 ≪문화를 넘어서(Beyond Culture)≫에서 고맥락 문화(High Context Culture)와 저맥락 문화(Low Context Culture)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문화에 따라 소통 방식에 큰 차이가 있음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 컨텍스트(Context)란 ‘맥락’ 혹은 ‘문맥’ 정도로 해석되며, 이는 광범위하게 사용되며, 행동 및 언어 등의 흐름과 연결되는 접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드워드 홀이 말하는 High Context는 주로 의견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의사소통 방식이며, 이러한 문화는 일반적으로 동양 문화에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반면 Low Context는 돌려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의사소통 방식이며, 이러한 문화는 서양의 의사소통 방식이라 설명합니다.
High Context는 추상적이고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소통방식으로서, 겸손하고, 본심과 감추고 사양을 하며, 대화 자체에 은유적이거나 전체적인 컨텍스트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정보가 있기 때문에, 충분한 배경 지식을 알거나 상황을 이해하고 있어야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Low Context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데이터 수치화가 가능한 소통방식으로, 지나친 겸손은 불필요하게 생각하고 공평한 것이 우선입니다. 또한 직접적인 단어로 소통하고 단도직입적인 정보로 간결하게 소통을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빠르게 맥락적 소통을 할 수 있는 High Context와 달리 세부적인 내용을 모조리 설명을 해야 하는 단점이 있죠.
미국에서 발행하는 DC나 마블 코믹스 만화책을 보면, 하나의 화면에도 수 없이 많은 대사를 포함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만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경우는 “세세하게 알려줘서 고맙기는 하나, 집중하는데 방해가 된다”라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만약, 가족과 함께 밥을 잘 먹고 있는데, 아버지가 대뜸 "아주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 짓이다"라고 말을 건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상황을 자세히 봐야지 알겠지만, 뭔가 아버지께서 나의 행동이나 결과물 등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이 있고, 그것을 반어법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위에서 표현한 High Context Culture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말을 한국말을 잘하기는 하지만 서양 문화에 익숙한 미국인(당연히 익숙하겠지만)이 이런 식의 말을 들었다면 “It's a very good thing. you're good at it (아주 잘했습니다. 당신은 아주 잘하는군요!)” 혹은 "Way to Go" 정도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직역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현재 성능이 좋은 번역기도 같은 결과를 나타내 줄 것이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Low Context Culture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익숙해하는 문화에서는 뭔가 잘못한 점이 있다면 굳이 돌려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High Context에서는 알아서 이해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죠.
우리가 현시점에서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점은 고 맥락적(High Context) 의사소통과 저 맥락적(Low Context) 의사소통이 서양의 문화인지 동양의 문화인지를 인류학적 관점에서 따져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디지털 사회에서 어떤 사고방식과 의사소통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를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확실히 지금의 디지털 사회, 디지털 소통방식에 적합한 방식은 저 맥락적(Low Context) 의사소통일 것입니다. Low Context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넘어서 데이터 수치화가 가능한 소통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음성으로 말하는 방식 그 자체는 저 맥락적(Low Context) 의사소통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문자로 자세하고 명확하게 나의 의사를 입력하여, 프로그래밍 명령체계에 따라 그대로 이행되기 하는 것이 지금의 ‘디지털’이라고 본다면, 불명확하고 많은 주요 정보를 축약하고 진행이 가능한 지금의 음성 지시 방식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겠죠.
이를 직장 생활이라는 형태로 좁혀서 생각해 본다면, 이는 기존부터 대한민국이라는 문화에서 직장 생활을 해가며, 정확하고 상세하게 문자로 업무지시를 내리기보다, 손쉽고 빠르게 “그거 내가 시킨 일 했어?”와 같이 바로바로 하급직원이 알아서 대답을 할 수 있었던 문화에 익숙한 시대의 직원에게는 지금의 변화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겠죠.
큰 틀에서 지금의 대한민국 직장 문화도 단순히 말로 지시를 내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메일과 업무 지시서를 통해서 정확히 업무를 내리고, 그 자체를 성과 평가로 이어지는 식의 흐름이 이어져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회사 생활 전체의 업무와 일상의 의사소통에서도 모든 부분에서 말로써 행하는 방식이 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흐름에 있어서 달라지는 것은 “앞으로는 말로 하지 마시고, 메신저로 알려주시면 될 것 같아요”가 통하는 극단적인 조직문화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AI인간에 속하는 세대지만, 언어적 의사소통에 능숙한 개인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물론 과거에는 기본으로 가져야 할 능력이었지만 말이죠.
다음 주에는 이와 관련하여, 요즘에 주요 이슈가 되고 있는 "젊은 세대의 문해력 저하 문제"에 대한 조금 더 심도 있는 이야기를 준비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