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요일그녀 Mar 03. 2020

이혼하고 싶은 여자들, 이혼이 두려운 엄마들

- 당당하게 이혼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로

이혼하고 싶은 이유는 많지만 없다   

  

혼자 구청에 가서 이혼 서류를 가지고 온 적이 있다. 큰 아이가 태어나고 일 년쯤 지났을 때였다. 

겉으로 보기엔 별 문제없어 보였지만 직장생활과 돌쟁이 아이 육아를 병행하면서 안으로는 곪을 대로 곪아가고 있었다.      


신랑은 결혼 전과 그리 달라진 것 같지 않는데 나만 가족의 평온함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필이면 직장 업무도 과중되던 시기여서 야근이 이어졌고, 아침이면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해서 퇴근 후엔 다시 육아 출근을 하는 반복된 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다.      

포옹은커녕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눌 여유 없이 그 시간들을 보내면서 ‘우리가 부부 맞나’ ‘이 남자가 내가 7년 동안 연애한 그 남자가 맞나’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같은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악! 한계다!’ 싶은 순간, ‘이혼’이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간신히 아이를 재우고 난 늦은 밤이면 스탠드를 켜고 앉아 이혼 서류에 적을 사유를 생각했다.

      

성격차이?

육아문제?

시댁과의 불화?

배우자의 외도?

경제적 결핍?     


그때마다 뚜렷한 이혼 사유가 없어서 절망했다.    

  

그제야, 큰 사건이나 갈등이 없이도 이혼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 모든 문제가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부부도 있을 수 있겠지만 겪고 보니 아주 사소한 불씨 하나가 ‘이혼’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이후에야 나는 내 부모의 이혼에 대해서도 다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괜찮아 보이는 부부이더라도 문제는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다 괜찮은 건 아니었다.      


아무 말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편해지고, 아이 때문에 꼭 필요한 말을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화 없이 몇 주의 시간이 흘렀다. 신랑은 ‘쟤가 왜 저러나’ 가끔 눈치를 봤지만 언제나 그랬든 그냥 내가 스스로 괜찮아 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 : 픽사 베이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의 시간들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지금 와서 다시 떠올려 보면 명확하게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때 내가 이혼 서류를 챙겨 구청에서 나서던 날의 ‘나’의 모습이 잊히지는 않는다.      

‘나’라는 여성의 존재와 ‘엄마’라는 존재의 역할 사이에서 무던히 헤매던 모습. 

나는 여전히 그 날의 나를 기억하면서 산다.      


‘시간은 다 지나가,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다 추억이 될 거야.’ 같은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언젠가 그런 말을 여유롭게 내뱉을 수 있길 바랐다. 그리고 얼마쯤은 그런 시간이 내게도 찾아왔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 예윤이가 여섯 살쯤 되었을 땐 육아도, 직장생활도 할 만해졌다. 

‘나’라는 사람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일들, 엄마로서가 아닌 사회적 인간으로서 누리고 싶은, 갖고 싶은 ‘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희망에 부풀기도 했다.      


덜컥 계획에 없었던 둘째를 임신하고, 한동안 아이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다시 신생아 육아를 시작하면서 그 이전보다 더한 외로움과, 우울, 절망과 마주해야 했다. 


‘나’를 꺼내는 일이 영원히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져서 사소한 일에도 쉽게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 하는 내 몫으로 남아 있었다.      

간신히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언니에게 들은 첫마디는 ‘신랑은 뭐하고?’였다.     


신랑 역시 애쓰고 있었다. 

본인도 아빠가 처음이니, 시시때때로 감정이 널뛰는 아내 눈치 보면서, 야근이 이어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육아에 참여하면서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차라리 엉망진창 제 멋대로 하는 사람이었다면 화라도 내고, 싸움이라도 걸었을 텐데 ‘당신도 참고 있구나.’ 싶으니 제대로 된 대화를 시도하는 게 겁이 났다. (괜히 서로 담아 두었던 말을 털어놓다가 더 감정이 상할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혼자 꾸역꾸역 마음을 다잡으면서, 입을 닫고, 책으로 도망치면서 ‘이혼’ 서류는 다이어리 속에 고이 접어 넣어 두었지만, 이혼 후의 내 삶에 대해 생각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만약 이혼을 하고 혼자라면 어떨까.’      


그러나 애초에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내게는 양육해야 하는 두 아이가 있었으므로. 

그 아이들을 ‘나’라는 사람의 삶에서 도저히 빼내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아이 때문에 이혼을 하는 게 두렵다는 엄마들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이제 진짜 엄마구나, 깨닫게 됐다.      


‘아, 나는 이제 이혼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구나’ 느꼈을 때, 절망하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면 이혼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엄마로서의 삶을 후회하는 것이지 아이 그 자체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라고 뚜렷하게 구별 짓는다. 엄마가 아니고 싶어 하는 동경에는 자녀가 없는 상태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 소망이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 오나 도나스 <<엄마 됨을 후회함>> p109


오나 도나스의 문장은 정확했다.      


엄마 이전의 ‘나’는 이제 없다. 그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나는 많은 여성들이, 엄마들이 그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란다. 

그래야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 시간들을 건너며 알게 된 것은,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아이의 삶을 동일시하고, 명확한 사유 이를테면 폭력, 도박, 외도 같은 배우자의 부정한 행위 앞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희생을 강요당하고, 인내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전 시대에는 ‘엄마’들에게 참는 게 미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오죽하면 결혼하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이라는 말이 있었을까. 참고 인내해서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엄마들은 존경받아야 마땅한 존재였다.      


물론 그들의 삶은 존경받아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 삶을 답습하며 살 필요는 없다.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되지 않을까.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듯, 부모 역시 아이에게 귀속된 존재가 아니다. 아이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정상 가족’을 물려주고 싶다는 바람으로 참고 인내해야 하는 삶이란 얼마나 불행한가.         


이혼은 정답도 오답도 아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8년 이혼건수는 10만 8,684건이다. 같은 조사에서 혼인건수는 25만 7,622 건수였다. 인구 천명 단 이혼 건수는 2.5건, 결혼 건수는 5.0명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해 결혼하는 사람들 중 반은 이혼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사회가 ‘이혼’을 ‘이혼가정’을 바라보는 시각은 삐딱하다. 이혼한 여자는 자식들에게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당당하지 못하다.

      

이혼가정에서 자란 나는 이혼한 부모를 둔 아이의 삶이 어떤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경험했다.

      

이혼가정에서 자란다는 건 나이에 비해 굉장히 의젓하구나, 하는 말을 듣게 되는 일이고 

(다른 아이와 똑같이 행동해도) 잘 자랐구나, 하는 말을 듣게 되는 일이고, 때때로 괜히 주눅 드는 일이었다.      


개개인마다 차이는 분명 존재하겠지만, 내가 느낀 몇몇의 감정들을 떠올려보면 주된 감정은 '다른'이라는 단어가 주는 ‘주눅 듦’이었다.     


친구네 집과는 '다른'

평범한 가정과는 '다른'      


이제는 ‘다른’이라는 의미를 특별함까지는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오래전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니, 이혼 전 부모의 싸움을 보며 불안에 떨었을 때보다 각자 새로운 삶을 찾아 편안하게 살아가는 보며 사는 게 덜 불행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다른’ 개인이고, ‘다른’ 가족의 모양을 가지고 살아간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가르치는 ‘다른 거지 틀린 게 아니야’라는 말이 여전히 어른들의 세계에서 가르쳐야 할 의미라는 게 때론 절망스럽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말자.     


당당하게 이혼하기 위해 여자들이 갖춰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두려움, 사회적 편견, 외로움 같은 것들보다 우선 되어야 할 것이 경제적 자립일 것이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는 부모 중 한 명이 안심하고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일할 수 있는 시간에 아이들을 걱정 없이 맡길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고, 여성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 줄어들어야 하고, 어렵게 얻은 자리에서 쉽게 물러나지 않을 수 있는 구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성들이, 엄마들이 정당하게 대우받으며 일하지 못하는 사회라면 육아정책 개선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당당하게 이혼을 하자!‘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이혼’이 여성들의 삶에서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지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편견 때문에, 자녀 양육 때문에, 경제적 문제 때문에, 마치 정상가족에서 이탈하는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더 큰 고통을 참고 인내해야 하는 삶이란 얼마나 불행한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만 이야기되는 육아나, 복지 정책이 아니라 혼자서도 당당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뒷받침되는 현실성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런 사회 안에서 여성들이 언제든 본인이 필요할 때, 간절히 원하는 순간 이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전 04화 내가 선택한 결혼이니 모든 고통은 혼자 해결하라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