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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Feb 15. 2020

'행복한 가정' 말고 '행복한 개인'으로

- 행복도 경쟁이 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행복 찾기


“아빠, 아빠는 나랑 채민이가 있어서 행복해?” 

저녁 식사 후 과일을 앞에 두고 앉아 예윤이가 물었다. 


“그럼, 당연히 행복하지.”

“근데, 좀 전에 채민이 보면서 머리 한 대 쾅 쥐어박고 싶다,라고 했잖아.”      


26개월 둘째가 식사 시간 내내 짜증을 부리며 숟가락을 들고 장난을 쳐서 신랑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예윤이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었다.      


“어? 아니, 그건 그런 뜻이 아니라. 아빠는, 너랑 채민이 때문에 살고 너무 행복하지. 근데, 가끔 이렇게 막 말 안 들으면... 그냥 그런 마음이 살짝 들기도 한다는 거야. 진짜로 한 대 쾅 쥐어박겠다는 게 아니고......”      


신랑은 당황해서 길게 설명을 덧붙였다.

예윤이는 의심을 지우지 못했지만 그냥 아빠의 말에 수긍하기로 맘먹은 듯 다시 과일 먹는 일에 집중했다.      


순간 나는, 신랑이 농담처럼 내뱉은 말 한마디가 아이의 입장에서가 아닌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를 평가하는 불편한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말.      

마음이 불편해졌고, 나와 신랑은 난처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우리의 저녁 시간을 별 일 없이 그렇게 지나갔다.      

아이에게 ‘행복’이란 게 어떤 의미일까.      


아이는 내가 혼을 내거나, 심각한 말투로 나무랄 때 ‘내가 잘못했어’ 혹은 ‘앞으로는 안 그럴게’라는 말보다 “엄마는 지금 나를 사랑하지 않지?”라고 되물었다.   

하루 종일 하고 싶은 놀이를 다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갖고 싶은 것을 갖게 된 날엔 잠들 기 전 “엄마, 오늘 아주 행복했어.” 하고 말했다.  

    

아직은 마음도 생각도 딱 9살인 아이에게 사랑이나 행복이라는 감정은 자기 기준에서 그때그때 느껴지는 가장 솔직한 감정이었다.  

자기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감정, 그만큼의 행복.      


반면 나는,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과, 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바로 해 줄 땐 괜찮은 엄마가 된 것 같았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나중에’ 혹은 ‘그건 안 돼.’라고 말할 땐 어쩐지 부족한 엄마가 된 것 같았다.      


그건 나의 생각일 뿐이었지만–아이는 엄마가 ‘나중에’라고 말했을 때 아주 잠깐 실망했지만 대부분 곧 잊고 말았다- 자주 나의 ‘엄마 됨’을 규정하는 가장 큰 기준이 되기도 했다.   

   

엄마니까 뭐든 해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것. 

그것들 때문에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던 많은 시간들을 놓쳤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그때의 아이도, 그때의 나도 사라진 뒤였다.      

   

Image by Pexels from Pixabay

 

행복 경쟁          


‘행복한 가정’이라는 건 누구를 기준으로 하는 말일까.      


아이가 어릴 땐 아이에게 자주 물었다.      

“예윤아, 행복해?”


아이가 행복하다고 말하면, 나도 행복한 것 같았다.      

누군가의 행복을 자꾸 확인하면서 내가 행복한지 확인받고 싶었다. 

그게 아이라면, 아이가 행복하다고 말하면 그 행복은 진짜일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부모가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이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거나, 아이가 잘 살기를 원하면 부모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들은 수많은 육아서에서, 부부관계를 다루는 책 속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다.     

 

결국 부모가 잘해야 한다는 것. 


한동안은 나 역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자라니까.’ ‘가정 안에서 부모와 자식이 맺는 관계를 통해 아이는 사회로 나가 관계 맺는 힘을 기를 수 있으니까.’ 하는 말들에 기대 ‘내가 먼저 행복한 모습을, 부모가 먼저 행복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내가 우울한 감정을 겪을 때나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에 외롭다는 감정을 느끼거나,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다고 느낄 때조차 ‘내’가 먼저가 아니라 그런 감정을 내가 느끼므로 인해서 불편해지는 가족들과 아이들을 떠올리며 괜찮아져야 한다고 주문을 걸 듯 되 내이며 버텼다.    

  

어렸을 때 나의 부모는 자주 싸웠다. 

가진 게 없어서 싸웠고, 싸우다 보니 또 화가 나서 싸웠다. 

어느 날엔 엄마가 집을 나가고, 어느 날엔 아빠가 집을 나갔다. 


잠시 일 때도 있었지만 오랜 시간일 때도 있었다. 

그들이 싸우다 지쳐 드디어 헤어졌을 때, 아마도 나는 상처 받았겠지만 함께 있어 불행한 그들을 보는 것보다는 헤어져 살면서 밝고, 건강하게 사는 모습이 나를 더 위로했다.   

   

부모가 행복하면 아이는 적어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진 않을지 모르지만 그게 오롯이 아이의 행복이 될 거라고 단정하는 건 위험하다. 내가 자라면서 경험했던 부모의 불화 때문에 지금의 내가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보니 내가 아이의 행복을 물어보면서 나의 행복을 확인했던 건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엄마’ 역할에 과도하게 몰입했던 순간 불안한 나의 마음을 감추려는 노력이었다.   

   

부모가 훌륭하다고 해서 아이들이 모두 훌륭하게 자라지 않고, 부모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해서 아이가 모자라게 자라지도 않는다. 물론 그 간극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고, 자신 스스로 주변의 관계들을 만들어 나갈 힘이 있고, 힘든 환경을 극복해 나갈 능력이 있다. 


당연히 이혼한 부모라고 해서 어딘가 모자라거나 나쁜 사람인 것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애초에 모든 행복이 ‘가정’이 행복해야 한다는 가정 아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아이들을 향해 지나친 판단을 내리고 사는 건 아니었을까.       


‘가정’이 행복해야 한다는 말 이면에는 ‘가정’이 사회적 기반이고, 그 기반이 단단해야 이 사회가 지탱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모든 것을 가정의 책임으로 돌리는 게 가장 쉬웠던 우리 사회에서 가정이 해체된다는 것은, 가정을 부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회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말이다.      

그로 인해 ‘가정의 행복’을 위해선 누군가 희생해야 했고, 대부분은 부모가, 대부분은 엄마가 그 희생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래서 해피엔딩으로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나면 좋겠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렇게 간단하게 행복을 쥐여 주지는 않았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한국 사회에서는 가정의 행복조차 경쟁이 되는 걸 종종 경험하게 됐다.     

행복의 기준이 무언가를 소유하고, 남보다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부족함 없이 채워진 순간이라고 믿는 순간 더 많이 갖기 위해, 남들이 다 가진 것을 나의 아이만 없다고 느끼지 않도록 부모는 지속적으로 소비하고, 채우기를 반복한다.      


“엄마, 00는 이번에 코타키나블루에 갔대. 엄마 00은 가족 여행 가느라 학교에 현장학습 신청을 내고 안 나와. 엄마, 00는 닌텐도 게임기를 선물로 받았대. 엄마, 우리도 높은 차(큰 차) 였으면 좋겠어. 엄마, 00 이는 학원을 네 군데나 다닌데, 엄마, 00 이는......”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매일 비슷한 말들을 했다. 대부분은 누군가와 비교하면 자신이 갖기 못한 것에 대해 부러워하거나 아쉬워하는 말들이었다.      


그러면 나는 아이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척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기를 돌렸다.      


해외여행을 가려면 적어도 휴가는 며칠을 내야 하는데,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닌텐도 게임기 정도는 우리 수준에 사줄 수도 있지 않을까, 차는 다음에 바꿀 땐 좀 더 큰 차로 사야 하나, 그럼 우린 해외여행은 못 가도 제주도라도 가볼까. 학원은 지금이라도 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 줄 수 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 모든 걸 당장 아이 눈 앞에 떡하니 쥐여 줄 수 없을 때 어쩐지 부족한 엄마가 된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대신 아이가 만족할 만한, 친구에게 가져가 자랑할 수 있을 만한, 아이가 원한 장난감을 충동적으로 사주기도 했다.      


혹시라도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을까 걱정하느라 그 순간 아이와 즐겁게 놀 타이밍을 또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아이가 원하는 것을 얻고, 행복해할 때, 다른 가족 구성원이 행복해할 때, 정말 나도 행복했는지. 그게 내가 원하는, 나라는 개인이 누리고 싶은 행복이었는지. 

   

Image by Denise Husted from Pixabay

      

행복의 기준           


화목한, 행복한 가정이라는 말 안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그 행복을 위해 부모는 기꺼이 아이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고, 부모가 희생했으니 아이들은 그만큼 행복을 느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논리가 숨어 있는 듯 보였다.      


가정이 행복하지 않으면 학교생활에서도, 사회생활에서도 안정을 찾기 힘들다는 오래 뿌리내린 편견이 더해져 화목하지 않은, 행복하지 않은 가정이라는 건 마치 정상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듯도 했다. 


각박한 세상에서 단란하고 포근한 위안을 얻을 곳은 가족뿐이라는 믿음이 강할수록, 가족을 그렇게 배타적으로 성스러운 것으로 만들수록 ‘우리’ 가족 밖 세상은 점점 더 위험하고 고역스러운 곳이 된다.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이 가족을 그렇게 배타적으로, 특별하게 여길수록 가족 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구성원 모두 절망 속으로 추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화목한 가정이란 환상이 클수록 그 가족은 서로에게 환장할 가족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홍주연 <<환장할 우리 가족>>   중에서


누군가의 행복에 기준이 있다는 게 맞지 않는 말 같지만 우리 사회에서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할 때 흔히 떠올리는 모습은 분명히 존재했다. 정상이라고 단정 짓는 범주들.     


대표적인 전제가      

‘행복한 가정이란 모름지기 부모와, 자식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     


조손가정, 이혼가정, 한부모가정, 미혼가정, 동성가족 등등 다양한 가정의 모습들이 공존하며 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가정’을 규정하는 건 하나의 모습뿐인 듯하다.     

 

조손가정, 한부모가정에 사회적 지원의 혜택에 더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 지원과 혜택이 그들이 정당한 권리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지, 

그들의 감정, 그들의 자존감, 그들의 행불행까지 지배하게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행복’을 작은 테두리 안에 가둘 때, 점점 ‘가정’은 스스로가 만드는 기준이 아니라 사회에서 만들어진 가치를 쫓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은 놓치게 되지 않을까.      


‘행복’이라는 감정이 상대적인 사회에서는 누구도 만족할만한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지금 나의 위치를 생각하고, 만족과 불만족을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게 만드는 지금의 사회에서 누구의 행복도 온전한 행복이라고 담보될 수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의 가치를 설명하는 일이 참 어렵다. 

아이는 자신이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그 때문에 슬퍼하기도 했다. 때론 작은 ‘사탕’ 하나에도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것에 기꺼이 만족할 수 있도록, 가지지 못한 것은 언제든 자신의 노력으로 채울 수 있도록, 누군가의 행복과 불행을 자신의 행복과 불행의 척도도 삼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행복한 가정’이라는 말 앞에서 누군가는 희생하고, 누군가는 소외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사회적으로 규정하는 ‘행복’이라는 말 앞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이,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묵인되지 않기를 바란다.      


‘개인’의 행복이 모여 우리의 행복이 만들어지는 사회가 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 더 빛나고 소중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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