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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Jan 19. 2020

 결혼까지만 생각했어

-  결혼 준비는 결혼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 


2010년 4월, 7년의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계획은 딱 거기까지였다.


오랜 연애는 결혼 아니면 이별이라는 믿거나 말거나 한 공식 중 내가 선택한 건 결혼이었다.   

  

잘 만나고 있던 애인과 이별할 만한 이유가 없었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었고, 비혼 주의자(당시엔 그 개념이 그리 부각되던 시기는 아니었지만)도 아니었으니 딱히 결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감동적인 프러포즈 같은 건 없었지만, 그 당시 애인은 2년 전 아파트를 구입해 전세를 주었는데 세입자의 전세 만기가 다가왔다. “다시 전세를 주는 것보단 결혼해서 우리가 사는 게 낫지 않겠어?”라는 애인의 말은 현실적인, 그래서 거절할 수 없는 프러포즈에 가까웠다.      


집을 구하러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만으로 우리의 결혼 조건은 충족된 듯 보였다. 스몰웨딩이나 가족들만 모여 인사 정도만 하는 결혼식은 당연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듯 예식장을 잡아 결혼식을 올리고, 신부나 신랑의 하객보다 부모님의 하객이 당연히 많은 누구나 예상하는 뻔한 결혼식을 준비했다. 그 ‘뻔함’이 사회가 규정하는 ‘평범’이라는 의미에 가까운 것 같아서 한편으론 안도했다.      


데이트 삼아 웨딩박람회를 투어 하고,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를 계약하고, 청첩장을 제작해 돌리고, 신혼 여행지를 결정하고, 신혼집에 들일 가구나 가전을 선택하는 것까지 하고 나니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딱 거기까지. 내가 생각한 결혼이라는 건 말 그대로 ‘결혼식’ 까지였다.      

Image by Pexels from Pixabay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예쁘게 포장된 결혼식. 그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무지하게도 계획에 없었다. 무지해서 용감했다. 7년의 연애 기간 동안 거의 매일 만나면서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기가 막힌 착각은 옵션이었다.      


2019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혼인건수는 내가 결혼을 했던 2010년부터 2018년까지 꾸준히 줄어들어 2010년 32.6만 건에서 2018년 25.8만 건으로 지속인 하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마흔이 되었지만 ‘결혼은 아직, 글쎄...’,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고, 세 살 터울인 언니는 이미 몇 년 전에 난 ‘비혼 주의자’라고 선언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예전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결혼식’이 아닌 ‘결혼’이라는 의미가 가지고 있는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들을, 문제들을 분석하고, 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결혼이 희망이나 미래가 아닌 절망이나 과거 회귀에 가까운지 이야기한다.      


얼핏 보면 개인적인 신념으로 비혼 주의를 선택하고, 결혼을 미루거나, 아예 자신의 인생 플랜에서 삭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신념을 갖게 하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 이를테면 비정규직 시대, 청년 실업률, 좀처럼 안정화될 것 같지 않는 집값, 기혼여성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차별, 시시때때로 변하는 육아정책 등등등에 대해 이제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공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떤 정책을 내놓아도, ‘에잇, 됐어! 그래야 뭐가 그리 달라지겠어.’하고 외면하게 되는 사회에서 어쩌면 비혼 주의는 현명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만 이야기되는 출산과 양육, 그렇기에 그 틀 안에 있을 때에만 보호받을 수 있는 반쪽짜리 제도들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결혼이라는 미래를 꿈꾸지 못하게 만든다.      


그때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였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 본다. 오래 연애를 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결혼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결혼을 선택하고, 결혼=출산이라는 공식까지 촌스럽게 지킨 나는, 지금의 ‘나’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결혼 후 아이를 낳기 전까지의 기간을 ‘신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딱 2년의 신혼 생활이 내게도 있었다. ‘결혼까지만’ 생각했던 나는 결혼식 후,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현실로 복귀했을 때 내게 주어진 ‘아내’ ‘며느리’ 역할에 대해 역시 아무런 대책도, 대비도 되어 있지 않을 상태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결혼이든, 결혼 적령기에 그냥저냥 맞는 사람을 찾아 하는 결혼이든, 누구나 결혼식을 앞두고 새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두려움보다는 설레는 마음을, 희망을 갖는다.     

 

그 희망이 깨지는데 불과 신혼여행기간이 끝나는 딱 일주일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 ‘ 이 결혼, 무를 수는 없을까?’ 생각하는 자신과 마주하는 우리는 당황한다.

‘내가 생각한 결혼은 이런 게 아닌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으니 마냥 행복해야 하는데, 내가 이상한 건가’ 스스로를 자책한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이 사회를 탓하기엔, 너무 멀리 온 것일까. 아니면 너무 늦은 것일까.


모든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가족의 역할로 떠넘기려는 낡은 관습과, 쉽게 고쳐지지 않는 제도들 사이에서 여전히 결혼한 여성들은, 엄마가 된 여성들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선택한, 엄마가 되어버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의 경우, 처음엔 무작정 책을 찾아 읽었다. 이 모든 불편과 불안이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 같아서, 불편한 문제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어서  ‘자존감’ ‘나다움’ ‘아내’ ‘엄마’ 같은 단어들이 들어가는 책들을 찾아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의 ‘나’는 적어도 행복했다. 그대로만 하면 ‘나’도 행복해지고, ‘아이’도 행복해지고, 가정도 평화로울 것 같았다. 책을 덮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다 사라져 버리는 행복이라는 걸 알면서도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올해로 결혼 10년, 큰 아이가 태어나 엄마가 된 지 9년 차에 접어들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나는 이제 엄마보다 ‘나’를 먼저 찾아야 한다는 엄마의 마음공부를 부추기는 사회가, 아이보다 먼저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로 엄마의 노력과 희생을 ‘엄마’ 개인의 문제로 둔갑시키는 엄마 인문학 공부라는 말이, 자존감을 찾기 위해, 엄마인 나를 지키기 위해 수반되어야 한다는 엄마의 ‘독서’ 강조가 불편하다.      


엄마의 마음공부가 엄마의 인문학 공부가, 엄마의 독서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것들은 ‘엄마’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개인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굳이 ‘엄마’라는 말을 붙여 안 그래도 흔들리는, 안 그래도 죄책감에 빠지기 쉬운, 안 그래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 쓰는 ‘엄마’들에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라는 고민을 하게 하는 이중 폭력은 아니었을까.


결혼과 출산을 하라고 그렇게들 강조하면서, 그 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진정한 어른이 되지 않으며 무려 애국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면서, 막상 현실에서는 과제 수행의 대가로 불이익을 준다. 대부분의 짐을 여성 개인이 짊어지게 만든다. 국가와 기업은 여성의 상황을 나아지게 만드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은 채 변함없이 억압하며 요구할 뿐이다. 결혼이나 출산을 민폐로 만드는 건 개인이 아니라 사회다.
조직이 해야 할 일을 구성원에게 떠넘김으로써 해당 구성원 개인의 문제, 즉 '민폐'로 만드는 것이다. 정당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인식이나 차별을 방지할 시스템은커녕 오히려 아직 하지도 않은 결혼과 출산을 핑계로 취업에서부터 불이익을 줘버린다. 휴직 기간 동안 대체인력을 뽑지 않고 육아 비상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 등...... 결국 개인이 지쳐 나가떨어지도록 만든다. 온 사회가 여성을 구조적이고 치밀하게 배제해왔다고 밖에 볼 수 없다.
- 사월 날씨, 『결혼 고발』중에서, p134   

 

결혼까지만 계획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나,

결혼이라는 제도를 선택한 여성들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에 대해, 엄마가 되기를 선택한 여성들에게 드리운 이유 없는 죄책감에 대해, 일하는 엄마를 미안하게 만드는 사회에 대해, 그리하여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졌다.     

 

겁도 없이 결혼을 선택하고, 무모하게 엄마가 되었지만 그것이 잘못이 아닌, 괜찮은 선택이라고, 적어도 다시 물리고 싶을 일은 아닐 거라고 그 길을 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순간이 언젠가는 꼭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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