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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Apr 30. 2020

엄마니까 ‘모성애’가 충만할 거라는 나쁜 착각

- 모성의 의미

‘모성애’는 엄마가 되면 당연히 생기는 건 줄 알았다. 


어른들이 종종 하는 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라는 말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그 생각이 산산이 조각나 부서진 것은 ‘모유 수유’라는 장벽을 만나면서였다.     

 

첫 아이가 태어난 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기가 빠는 힘이 약한지(모유가 잘 안 나오니 그랬겠지만) 젖을 물려도 충분히 먹지 못했고, 먹는 양은 부족하니 먹으면서도, 먹고 나서도 울음이 그치질 않았다. 아기가 잘 빨지 못하니 당연하게 젖몸살이 왔고, 딴딴 해지는 젖가슴만큼이나 마음도 딱딱해져 갔다.     

 

어느 순간부턴 유두가 갈라지고, 아기가 입을 가져다 대기만 해도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수유실 간호사들은 그래도 물리라고, 계속 물려야 된다고, 내 젖꼭지가 자기 것인 양 무심하게 유두 보호기를 붙여주며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다.      


‘포기’라는 말을 그렇게 들을 줄이야.      


“확실히 달라. 내가 첫 애는 모유수유를 못해서 둘째는 악착같이 했거든. 확실히 둘째가 덜 아파.”      

먼저 아이를 낳아 키운 선배 맘들의 말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따끔따끔했다.     

 

모유수유가 모성애의 상징이라도 되는 듯 표현되는 기사들과, 모유수유로 자란 아이들과 분유로 

자란 아이들을 비교한 연구결과는 ‘아파도 조금만 더 참아보자, 참아야 해.’ 스스로에게 주입하며 이를 악물게 했다. 너덜너덜해진 젖꼭지를 부여잡고 울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이 악물며 버틸 때 얼마나 정신적으로 생채기나 나는지 말하지 않아도 공감하지 않을까.     

 

젖몸살 풀어주고 모유수유를 도와준다는 오케타니 마사지를 1회에 15만 원씩 내고 받아가면서 기어이 몇 개월을 버텼다. 내 몸만 이상한 건지, 마사지는 받고 나닌 하루 이틀의 효과만 있을 뿐이었는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계속 받느라 아까운 돈만 날렸다.      


좋아하는 커피도 못 마시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떡볶이도 참아가면서 버텼지만 결국 남은 건 점점 심해지는 젖몸살과, 우울감뿐이었다.      


비싸지만 좋다는 후기를 찾아 읽고 유축기도 구입했지만, 유축기를 볼 때마다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다니고 있는 직장에는 수유실은커녕 여직원 휴게실도 없어서 화장실에 들어가 유축을 하던 동료 여직원의 모습까지 떠오르자 우울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Image by mariagarzon from Pixabay   


첫 아이 때의 경험은 6년 후 둘째 아이를 낳은 뒤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출산의 고통보다 모유수유에 대한 두려움이 분명 내게는 더 컸던 것 같다. 그 기억 때문에 둘째를 낳고 나서는 초유만 딱 먹이고 선언했다.      


“나 모유 수유 안 해!”     


그때, 신랑의 한 마디. 

“어차피 너 첫째 때도 얼마 안 먹였으면서 뭘.”    

  

이런, 나쁜 놈. “네가 먹여봐라.”라는 말을 차마 내뱉지는 못하고(그때 내뱉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뒷북을 친다), “뭐.. 그렇지”라고 대답하고 넘긴 건 지금도 후회하는 일 중 하나다.   

   

모유수유 중단을 선언하고 찾아온 여유는 생각보다 더 짜릿했다. 


분유는 아빠 혼자도 충분히 타서 먹일 수 있으니, 아빠와 아기 둘만 남겨두고 혼자 하는 외출이 가능해졌다. 밤중 수유를 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수면의 질이 높아졌다.   

   

간혹 만나는 시가 어른들이 “어머, 넌 젊은데 왜 모유가 잘 안 나온다니.” 같은 말을 툭툭 던지긴 했지만, “그러게요, 호호호”로 그 상황을 넘겼다. 불쾌한 순간은 그런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달콤한 순간은 길었다.      


그 뒤로 아이를 낳을 후배들에게 제일 많이 한 말이 “젖 잘 안 나오면 애쓰지 말고, 모유수유하지 마.”였다. 

“아이 낳느라 그 고통을 참았으면 됐지, 모유수유로 또 그렇게 아파야 해? 분유 먹여도 애 잘 커. 아마 분유만 먹여도 네 육아 우울증은 절반으로 줄어 들 거야”.      


그 시간들을 지나왔지만, ‘엄마’가 되면 모성애는 당연한 거고, 모성애를 가졌으니 자신의 고통쯤은 당연하게 참으며 ‘모유수유’를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는, 마치 모유수유가 모성의 시작 이기라도 한 듯한 발언들은 여전히 불편하다.      


엄마가 되고 난 뒤 우울함이 시작되고, 자존감이 낮아지는 최초의 순간도 바로 그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에게 최초의 죄책감을 안기는 순간 말이다.      


육아서들을 읽다 보면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을 때마다, ‘아, 나는 나 좋자고 모유 안 먹이고 분유를 먹이는 거 아닌가, 그래서 아기가 건강하지 않나’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직접 육아를 해보니, 엄마의 모성애는 이 사회가 교묘하게 이용하는 엄마들을 이용한 정치적 공작처럼 느껴졌다.      


‘모성’ 이라는 말이 붙으면 모든 게 일정 부분 넘어가고, 해결될 수 있다고 은연중에 주입하는 것들 말이다. 

변하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데 성공했구나 싶어서 화가 났다.      

비단 모유수유뿐만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모유 수유’만큼 엄마의 모성을 시험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단언컨대 '모성'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악질적으로 남용되는 단어다모성의 사전적 뜻은 "어머니로서 가지는 정신적육체적 성질또는 그런 본능"이지만사회문화적으로 함의된 솔직한 뜻을 풀어보자면 "어머니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태도"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감정이란 본디 정확하게 그 실체를 표현하기가 어려운데모성만큼 간단명료하게 설명되는 것도 없다모성은 모성''다른 감정의 결이 여기에 끼어들 순 없다모성에 ''가 붙는 순간존중받아 마땅한 각자의 '희로애락'은 부차적인 게 된다이 사랑의 감정은 당연히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여기까지는 동물의 모성 본능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어머니의 특별한 마음은 문명의 손길을 거부한 오지의 원시 부족사회에서도 존재하지만 아이를 위해서 '어떤 경우도 마다하지 않는한국적 모성과 동급일 리는 없다사회적 가치에 어긋나도 마다 하지 않는 것이자기 몸과 마음이 무너져가도 상관 않겠다는 것이 과연 본능일까?     

본인의 자존감이 무너지고 말고를 가리지 않는 감정이 '엄마'라는 사람의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감정이라니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하지만 사회는 그러한 모성을 본성이라 규정한다. - 오찬호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 <가장 악질적으로 '남용'되는 말모성중에서, p75     


모성이나 모성애라는 말로 희생과 헌신을 강요받던 시대는 끝났다. 아니 끝나야 한다.  

    

모유수유는 필수가 아니다. 여러 가지 선택지 중 하나일 뿐.      

선택은 엄마인 ‘내’가 하는 거다.      


그러니 시어머니가 늘어놓는 고릿적 이야기에도, 주변 사람들의 모유수유 성공기에도, 혹시 모르게 찾아올 죄책감에도 흔들리지 마시라.      


아니, 흔들리더라도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시라. 

지나고 보면 모유수유 그거, 별 거 아니다.(그럼에도 아이 두 돌이 될 때까지 모유만 먹여 키웠다는 직장 동료를 보며 나 잠깐, 존경의 눈빛을 보내긴 했다.)     


큰 아이가 이제 아홉 살, 둘째가 26개월을 막 지났다. 

그 사이 아이들은 종종 아프기도 하고, 이런저런 병명으로 입원을 하기도 했다. 

일하는 엄마라 못 챙겨주나 싶은 미안함과, 모유수유를 못해서 아이들이 면역력이 약한가 하는 혼자만의 무거운 마음을 가진 적도 있다.      


그런데 또 다르게 생각해보니,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아픈 만큼 아팠고, 어른들도 종종 걸리는 감기나 장염을 앓았고, 약을 먹거나 쉬면서 또 그 나이의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엄마인 내가 미안한 마음이나, 죄책감을 갖는다고 해서 아이가 아프지 않거나, 빨리 증상이 호전되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라서 미안한 마음은, 내가 가진 ‘엄마’라는 말에 부여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의미부여 때문이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이런 감정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든 이후, 나는 나의 ‘모성’을 내 마음대로 규정하기로 했다.    

  

‘아이’라는 존재 앞에 내 모든 것은 뒤로 젖혀두고 ‘아이’를 향해 달려가지 않으리라. 

내가 ‘나’라는 존재가 더 중요한 순간,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리라. 

아직 어린아이에게 종종 라면을 끓여 먹이고, 친구가 그리운 날 나도 내 친구를 만나러 나가고, 퇴근 후 피곤한 저녁 TV 앞에 아이를 앉혀두고 휴식을 취하고, 맛있는 게 있으면 아이 먼저가 아니라 똑같이 나눠 먹는 일들 앞에 ‘나 너무 모성이 부족한 엄만가’ 같은 생각들은 집어치우리라. 

     

대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거짓 웃음이나 행복한 척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 진짜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간혹 아이가 간절히 ‘나’를 원하는 순간엔 ‘아이’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일을 기꺼이 하고, 아이와 함께 하는 짧은 시간에 아이에게 집중하고, 아이가 혼자서도 안정감을 느끼며 놀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길러주는 것.      


사회가 규정하는 모성애愛가 아니라, ‘아이와 내’가 함께 만들어 가는 우리만의 모녀애愛를 만들기로 말이다.      


‘엄마가 당연히 가져야 하는 태도’는 없다. 

그러니 기꺼이 당당해 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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