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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Oct 09. 2022

인정할 건 인정하고, 포기할 건 포기하자

큰 아이가 여덟 살 때 폐렴으로 입원한 적이 있다. 아이를 간호하면서 병원 간이침대에서 자는 잠은 눈 붙임에 가까웠다.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의 발소리, 커튼 여닫는 소리, 아이 체온을 재는 손길 모든 게 수면을 취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채로 아침을 맞이했다. 아이를 퇴원시키고, 집에 오자마자 새 밥을 지어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나니 엉덩이 한 번 붙일 시간 없이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큰 아이와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남편은 둘째 아이를 돌봤다. 밤새 칭얼거리고, 뒤척였을 아이를 재우고, 챙기느라 새벽잠을 설친 남편의 컨디션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토요일임에도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자 두 아이와 나만 남았다. 컨디션을 되찾은 큰 아이와, 언니와 엄마가 집에 와서 좋은 둘째는 에너지가 넘쳤다. 엄마인 나만 지쳐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쉬고 싶었다.    

   

순간 얼마 전 읽었던 육아서 한 권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상에 가까울 '엄마 역할' '아빠 역할' '아이 주도적인 생활' 등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되새기며 불편한 마음이 되고 말았다. 지금 내가 쉬고 싶은 마음이 든 것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내 마음의 삐딱함 때문에 괜히 책 속의 이야기들에 괜히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가. 정말 그렇게 다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나만 못하는 거 아닌가. 당시 23개월을 지나던 둘째가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만지는 사이 잠깐 찾아온 평화에 안도하는 나는 나쁜 엄마인가. 컨디션을 되찾은 큰 아이가 "엄마, 심심해. 놀자"라며 안겨올 때 "엄마 좀 힘들어. 혼자 놀아 잠깐만" 하고 말하는 나는 너무 이기적인가.    

  

책 속에서 그런 엄마가 나쁘다거나, 이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조금만 노력하면 아이는 스스로 성장해 갈 힘을 얻고, 엄마도 자신의 중심을 잡으면서 아이와 함께 하는 육아를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다독였다. 그럼에도 그 다독임조차 때로는 위로가 되지 않고 삐딱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아이 앞에서 엄마는 ‘나’보다 ‘엄마’ 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 역시 아이가 한 명일 때는 36개월이 될 때까지는 최대한 스마트폰도 TV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둘이 된 뒤, 때론 노력만으로 육아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엄마는 철인이 아니라는 것과 엄마가 누리는 잠깐의 여유는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지금도 여전히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내어줄 때 갈등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려고 애쓴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는 아니야. 아이가 미디어에 시간을 쓴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 함께 놀아주면 돼. 그전에 내가 좀 쉰다고 해서 나쁜 엄마는 아니야. 나는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어'라고.     


우리의 선택은 늘 최선이었다. 과거를 곰곰이 되짚어보니 도저히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다 해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할 수 없었던 거기까지가 바로 최선이었다. 
- 한경은, <<당신은 그때 최선을 다했다>>, 수오서재


어쩌면 자기 합리화 일지도 모르는 이런 나의 애씀이 지금 나에겐 최선이다. 그 마음을 인정하고, 더 이상 할 수 없는 걸 포기해버리고 나니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아이들에게 소리를 높이거나, 나도 모르게 불쑥 짜증을 내는 일도 줄어들었다.      


때로는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 두 아이의 양육, 남편과의 좋은 관계 유지, 집안일도 척척해 내야 하는 일이 모두 엄마의 책임 같아 억울할 때도 있다. ‘가정의 평화는 엄마 하기 나름이에요’처럼 들리는 상황들이 불편했다. 부캐로 사는 하루 2,3시간 남짓의 시간조차 죄책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돌려 말해도,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육아에는 엄마의 희생이 필요한 게 맞다. 아이가 어릴수록 더 그렇다. 불편한 현실이지만 그것마저도 인정하기로 했다. 대신 그 희생을 훗날 억울하게 느끼지 않기 위해 아니, 희생했으니 보상하라고 생떼 부리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방어막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지금의 ‘나’를 지키는 최선이라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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