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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책 읽는 걸 싫어해

그렇다고 너까지?

by 니트

나는 책을 싫어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책 읽는 걸 좋아한 적이 없었다. 자기 개발서는 진부하게 느껴지고, 소설책은 기승전결의 '기'부분도 채 읽어내지 못한 채 지루함에 휩싸여 잠들어버린다. 종이와 활자가 주는 따분함은 교과서는 물론이고 만화책도 예외가 없어 조금만 내용의 박진감이 사라지면 눈꺼풀이 감기곤 했다. 졸음 자체에도 취약한 편이어서 학창 시절 수업 중 졸음이 찾아오면 정말 고역이었다. 어쩌다 서점에 가게 되면 '아 이제부터라도 책을 열심히 읽는 지식인이 되어야지'라는 지적 허영심 같은 것이 들기도 하지만, 서점을 나가는 순간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 와중에 정말 모순적인 건, '글쓰기'에 대해서는 꽤 흥미를 갖고 있다는 점.


조카는 내 아들보다 딱 한 살 많은데, 이런 나와는 성향이 정반대다. 거의 책을 사랑하는 지경이다. 초등학교 1학년인 조카는 유치원생 때부터 책을 손에 달고 살았다. 학구열 자체도 매우 높았고 책을 통해 온갖 호기심을 해결하고 또 다른 호기심을 가지는 일이 즐거워 보였다. 가족여행으로 일본에 가는 비행기에서 2시간여의 시간 동안 나도 이해 못 할 것 같은 과학책을 내내 읽는 걸 보고, '와 저런 애가 진짜 있구나' 싶었다. 벌써 원소기호 같은 것들을 들먹이며 나에게 퀴즈를 내는 조카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인 탓인가, 내 아들도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특히나 동화책에 관심이 없다. 유아 필독서라는 '계몽사 디즈니 그림명작'도 당근마켓에서 열심히 검색해서 마치 새것 같은 중고를 사다놔보고, 옛날이야기 전집도 책꽂이에 잔뜩 꽂혀있지만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꽃, 곤충 등을 다룬 과학책에는 그나마 꽤 관심을 보이며 흥미롭게 듣는다. 나도 수능 언어영역에서 문학보다는 비문학이 쉽게 느껴졌었는데.


거실에서 티브이를 없앨 용기가 없는 미디어 중독 부부인 탓에, '엄마 아빠는 쉴 때 책을 즐겨봐. 책은 매우 재미있단다' 같은 모습의 코스프레는 시도조차 못해봤다. 대신, 아들이 유튜브를 보더라도 교육적인 것 위주로 볼 수 있도록 채널을 검열하고, 영어로 된 콘텐츠를 더 많이 볼 수 있도록 나름의 미디어 조기교육을 했다. 넘버블럭스나 페파피그가 상당한 도움이 됐고, 알고리즘이 잘 형성되었는지 스스로 선택해서 보는 대부분의 것들이 영어로 된 콘텐츠이다. 이제 아들이 보는 콘텐츠에 나오는 영어는 난 못 알아듣지만 아들은 알아듣는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데 왜 진부하게 책만 읽으라고 해. 티브이나 태블릿으로도 충분히 교육적인 것들을 해줄 수 있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한글, 영어 그리고 수학까지 있는 '토도' 시리즈를 구독하며 아들에게 태블릿 사용을 꽤 일찍 허용했다. 화려한 색채감과 하면 할수록 올라가는 레벨과 상장처럼 주어지는 트로피 같은 것들에 현혹되어 아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토도 시리즈를 즐겁게 했다. 여행 가는 비행기에서 태블릿은 우리 부부가 온전히 비행을 즐길 수 있는 필수 아이템이었고, 잠시나마 육아에서 벗어나 온전히 맛집의 음식들을 즐길 수 있는 탈출구 같은 것이었다. '여보 우리는 아이 가지면 저러지 말자'라며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아이에게 핸드폰 영상을 틀어주고 식사하는 다른 부부를 험담하던 과거의 내 모습은 완벽히 잊은 채, '사람은 역시 상황에 직접 직면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해. 직접 애를 안 키워봐서 모르는 거지. 그리고 지금 내 아이는 꽤 교육적인걸 하고 있다고.' 라며 자기방어진을 두둑이 펼쳐 놓았다.


아들의 자아가 좀 더 형성되며 주체성을 갖고 고집이라는 게 생길 때쯤, 전자기기를 통한 육아에서의 해방은 달콤했던 것만큼 독이 되어서 돌아왔다. 자제와 절제 같은 것들을 스스로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기에, '이제 충분히 했으니까 그만해야지'라는 말은 아들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비행기를 탄다' = '태블릿을 마음껏 한다'의 공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고, '티브이를 1시간 가까이 봤으니 이제 그만 보자'라는 말은 '아 티브이 재밌게 봤다!'라는 마음보다는 '더 보고 싶은데 왜 못 보게 해!'라는 서운한 마음만 들게 했다.


명확한 규칙 설정 없이 엄청난 중독성을 품고 있는 것들을 너무 이른 나이에 과하게 노출시켰던 걸까. 나조차도 하루 종일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면서 누가 누굴 지도할 수 있을까. 내 한 몸 편하게 육아하겠다고 자기 합리화를 너무 했던 건가. 나는 여전히 겨우 이 정도 부모밖에 안 되는가. 끊임없이 자아성찰의 질문을 던지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아들의 생활습관을 바꿔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책을 읽어주는 건 선생님이나 유치원에 일임하고 숙제 챙기기에만 급급했는데, 오늘부터라도 시간을 좀 더 내서 책을 한 권씩이라도 읽어주자 다짐해 본다.



어떤 책들을 먼저 읽어주면 재밌어할까 고민하며 아들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맨 아래쪽에 꽂혀있는 위인전 시리즈를 발견했다.


"어, 아들 방에 위인전도 있었네."

"위인전이 뭐야?"

"아, 옛날에 훌륭한 사람들. 막 옛날에 대단하고 멋진 일을 많이 해서 유명한, 그래서 사람들이 오래오래 기억하는 그런 사람들 이야기야. 아빠도 어렸을 때 위인전 읽으면서 '나도 크면 이런 위인이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빠도 위인전이잖아."

"응? 아빠가 왜 위인이야."

"날 키워주잖아."

"... 어? 아, 그럼 위인이야? 하하하,

아이고, 아빠가 더 잘 키워줘야겠네 우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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