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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Jul 21. 2021

이제, 사랑보다 더 멋지고 놀라운 걸 노래하기로 해

국립극단 연극 사랑 II (Liebe II)


작년 한 해는 극장을 통 가지 못했다. 

공연을 보기 시작한 이후로 이렇게 극장을 오래도록 못 간 적은 처음이었다. 

올해 초가 되어서야 극장을 다시 가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조심스럽긴 하지만, 다행히 관객들은 이 소중한 영역을 지켜내기 위해 그 누구보다 방역 당국에 협조적이다. 거리두기로 가변석이 취소되고, 티켓팅이 번복되고, 캐스팅이 뒤바뀌고, 객석은 텅 비어있지만, 그럼에도 극장의 불이 꺼지지 않아서, 살아 숨 쉬는 극들을 만날 수 있어서, 참 즐겁고 다행스러운 요즘이다.




상반기 마지막으로 관극은 국립극단 <사랑 II>. 

연극의 배경은 지구 아래 깊고 깊은 핵이다. 꽃이 피어나고 물이 흐르는 그곳에는 

한때 아이돌의 꿈을 키웠으나, 아이돌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 사람이 등장한다. 

현무, 청룡, 주작은 이 창조의 공간에서, 

자신은 이루지 못했던 아이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없던 완벽한 아이돌을 직접 만들어낸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만족스럽고, 흡족스럽고, 짜릿하고, 유쾌한.

재밌고, 흥이 넘치고, 사랑스럽고, 꼭 다시 보고 싶은. 

세상 그 어떤 형용사를 갖다 붙여도 아깝지 않을 만큼 멋진 공연이었다. 

(박본 만세! 사랑투 만만세!)





그래서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콘텐츠에는 사랑이 큰 지분을 차지한다. 마치 모든 미디어와 콘텐츠가 사랑에게 모종의 커미션이라도 받는 것처럼, 사랑은 언제나 어디에나 용케 꼭 자기 자리를 꿰차고 있다. 모든 답이 사랑으로 귀결되고 완성되는 사랑의 홍수 속에서, 작가 박본은 묻는다. 

그래서 사랑은 정말 답이 되어줄까?


하지만 그 답은 모두들 알고 있다.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만 보였던 크고 위대한 사랑은 막이 끝나고 나면 그 종적을 홀연히 감춘다는 걸. 무대가 끝나고,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우리 삶 도처에 깔린 모든 순간에도, 아무리 위대한 사랑이 지나간들 여전히 공허하고 외로운 삶은 계속되기 마련이라는 걸.



사랑이지만 더 좋은 거야
Oh, 사랑, 다음엔 사랑 II, 그 후속편




오 사랑, 그 다음엔 사랑 II, 그 후속편

그래서 연극 <사랑 II>는, 사랑 그 다음의 것을 찾아보자고 노래한다. 그게 도통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 건지는 모르지만, 사실 사랑 다음의 무언가가 어떤 건지조차도 잘 모르지만, 사랑보다 더 완벽하고 완전한 것이 어디엔가는 분명 존재할 거라는 기대와 확신으로, 그래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과 믿음으로, 사랑 다음의 사랑 투를 외친다.




비록 그 실체가 연약하고 유약한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사랑 II>는 완전하고 완벽한 사랑 그다음의 존재를 한국의 아이돌 문화로 빗대어 표현한다. 한국에서 아이돌은 가수나 댄서, 퍼포머 같은 일반적인 직업군으로 분류되는 대신, 말 그대로 ‘아이돌Idol’이라는 고유한 영역으로 독특하게 불리어 진다. 마치 용이 되기 위해 9999년간의 세월을 인내하며 승천하길 기다리는 이무기의 생처럼, 이들은 어릴 적부터 이상적인 아이돌이 되기 위해 인고의 훈련을 버텨낸다.


<사랑 II>에서 완전한 사랑 II를 발견해 아이돌이 되는 존재는 등장인물 중 육체적으로 가장 키가 작고 여린 소녀 이무기다. 이 가냘픈 존재는 완벽에 가닿기 위해 수많은 관문을 통과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기도 전에 무대 위 누군가의 우상이 되는 흔한 아이돌처럼, 유약함 너머의 완벽함을 완성해낸다. 이무기짱을 바라보는 현무, 주작, 청룡 그리고 관객은 그녀의 유약함은 애써 외면한 채, 오직 완벽함에만 환호하기로 작정한다. 그 어디에도 있고, 그 어디에도 없는 완벽함에 박수 갈채를 보내며, 우리가 보고 만나는 이 우상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던 완벽한 구원이리라 힘주어 믿으며.



연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니까.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이토록 모호한 경계 속에 있는 이들의 세계를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렵다. 대신,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 자체에만 집중해보면 어떨까. 그렇게 차근차근 문장 단위로 떼어놓고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일기장에 쉽게 휘갈겨 쓴 문장들이 나타난다.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일의 희열과 즐거움, 꿈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간절함, 잃어버린 이를 그리워하는 슬픔, 절망감 끝에 매달린 처절한 고통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우리 모두의 무수한 감정들.


이들의 말은 각각의 재료를 모아 끓여낸 뜨끈한 한 상이 된다. 여러 모양으로 차려진 밥상에서 관객의 식사는 시작된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눠먹던 음식들을 종류별로 곱씹고, 또 누군가는 좋아하던 이들에게 건넸던 위로의 말들을 삼킨다. 다른 누군가는 뇌리에 꽂힌 말들을 계속해서 우물거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목구멍엔 장난과 진심이 섞인 말들이 자꾸만 아프게 걸린다. 그렇게 말풍선 사이에 가득 담긴 말들이, 여기저기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


이 모든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가는 무대 위 연출과 풍경, 배우들의 합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유쾌하고, 감탄스러울 만큼 아름답다. 새삼 연극은 이런 추상적인 소재 하나만으로도, 이토록 멋지게 환상을 그려낼 수 있는 유일한 장르라는 생각을 한다. 과감하고 아름답게, 연극만의 방식으로, 연극만의 접근으로. 그 어떤 것도 흉내낼 수 없는 연극만의 모습으로.



한여름 밤의 꿈, 연극 <사랑 II>

이 귀여운 허구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약속한 관객들은 열심히 함께 이 세계를 헤엄치며 나른한 꿈을 청한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면서, 바로 이 순간의 감정에 집중하면서. 때때로 기분 좋은 꿈을 다시 돌이켜보면, 도통 말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비록 말이 되지 않을지언정, 이 환상 같은 꿈을 흥얼거릴 수 있어 기쁘고 행복했다. 잠시나마 잊고 있던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어서 가슴이 벅찼고, 비록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그저 해맑게 웃을 수 있어 마음이 뭉클했다. 완벽하지 않기에 애써 무겁게 쥘 필요가 없다는 것에 큰 위안을 삼는다. 동시에 완전하지 않은 것들만으로도 충분한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기뻐한다. 한여름 밤의 꿈 같았던 <사랑 II>, 이 기분 좋은 꿈을 꼭 다시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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