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생활을 마무리하며
동네 울타리를 제 힘으로 넘어본 적 없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따금씩 베란다에서 엄마가 운동장을 뛰놀던 나를 찾아보겠다고 내려다보면, 나 역시 옥상에서 다섯 칸 아래 있던 17층에서 나를 찾는 엄마가 보였다. 그때 나는 키가 아주 작았으므로 또래에 비해 보폭이 꽤 좁았을 텐데도 작은 발걸음으로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가 그 시절 생활반경의 전부였다. 조금 자라 학원을 다닐 때에도 동네를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가끔 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거나, 다른 동네에 있는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어린 나에게 홀로 동네 밖을 벗어난다는 것은 대단한 도전이자 공포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떠한 객기가 생겨 난생처음으로 동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완벽한 이방인으로서 첫걸음이었다.
처음 홀로 됨을 느꼈던 순간은 아마도 등하굣길이었을 거다. 익숙한 나의 동네에는 손 뻗으면 학교가 있고 조금 걸으면 떡볶이집을 지나 학원이 있었다. 등하굣길마다 친구 따라 조금 걸으면 금세 집에 도착하곤 했고, 그때마다 집에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방인이 된 도시에서 나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야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대부분 혼자였기에 많은 시간 혼자 생경한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집에서 멍하니 앉아 맛없는 식빵 따위를 오물거리며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조금 커서 새로운 도시에 비로소 적응했을 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적응력 하나는 끝내주는 타입이라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적응했지만 그럴수록 외로움은 깊어져갔다. 공허함의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이 깊었다. 뿌리가 없어서였다. 땅 위의 내 삶은 제법 줄기가 굵어지고 때때로 꽃을 맺는 듯 보였으나 뿌리가 없어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물길 따라 떠내려갔다. 매일같이 하염없이 두어 시간 정처 없이 걸어 다니며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뿌리가 없는 나는 평생 이방인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다시 나고 자란 동네로 돌아왔다.
근 10년 만이었다.
보금자리에 돌아온 나는 드디어 아주 조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는데 역마살의 저주인지 뭔지 이따금 터전을 바꾸어야 했다. 고향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부산으로. 발걸음 닿는 곳마다 타인의 눈에는 그저 부러운 행보였을지 모르지만 나는 매 순간 이방인이 되어 맨땅에 버려지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타지에서 부산에 돌아오는 날에는 아무도 없는 부산역과 버스터미널이 너무도 어색해서 이 도시가 싫었다. 누구보다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공허한 순간이 불쑥불쑥 떠오르다가 가라앉다가를 반복했다. 가끔 무언가라도 움켜쥐고 싶은 마음이 스쳐갔다. 나의 외로움은 공허함이자 불안함이었다. 지긋지긋한 이방인 살이를 거부할 수 없는 팔자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온 맘 다해 이방인임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토록 불안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음을 고쳐먹자!
하지만 회피보다는 부딪히는 편을 선택해 왔기에, 어느 순간부터 생경함을 느낄 겨를조차 허락하지 말자는 심정으로 매 주말에도 부산에서 부산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사실 부산은 연고도 없는 사람이 홀로 주말 내내 지내도 결코 적적하지 않은 도시이기에 가능했다는 말이 맞을지도. 여름마다 발 디딜 틈 없는 해운대나 광안리는 물론이고, 자갈치 시장과 남포동 중앙동 곳곳에 노포 맛집을 찾는 재미하며, 뻥 뚫린 기장 바다를 보며 힐링하기도 하고 간간이 서핑이나 패들보드 같은 해양스포츠도 즐기다 보니 사계절이 내내 축제인 것만 같이 시간이 흘렀다. 봄이면 황령산이나 남천동 따라 핀 벚꽃을 보고, 여름이면 푸른 바닷물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가을이면 선선한 바람 타고 오는 금목서 향 맡으며 노상에서 회에 소주 한잔 털어 넣고, 겨울이면 또 결코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도시에서 동백꽃 피고 지는 걸 보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나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 도시가 그 어느 곳 보다 익숙하고 따뜻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확실히 더 따뜻하기도 하지만!
2023년에 내려왔으니 벌써 3년이 돼 간다.
이제는 제법 부산의 숨겨진 명소나 식당까지 척척 알아맞히고 사투리도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기 시작했는데 부산살이가 마무리되는 것이 퍽 아쉽다. 처음에는 거친 듯 보였으나 사실은 누구보다 속 정 깊은 따뜻한 부산 사람들과 따뜻한 이 도시에서 온 맘 다해 어울리다 보니 내내 얼어붙은 마음이 한껏 녹아내렸는데, 다시금 서울에 올라갈 생각을 하니 아쉬움이 가득한 요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써 내려간 나의 3년의 기록이 기억과 함께 이곳에 남을 터이니 그리울 때마다 돌아볼 곳이 있어 천만다행이다.
팔자에도 없는 부산이라며 눈물흘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부산에서 부산하게 지냈던 나날이 이제는 팔자에 강하게 남아 또 하나의 고향으로 영영 기억될 것만 같다.
우리가 부산한 이곳을 사랑해!
끝.
애초에 '부산은 팔자에도 없었어' 시리즈는 갑자기 시작된 부산살이를 조금은 한탄하며 그러나 타지살이 한번 신나게 지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에 내려와 파견, 순환근무, 이직 등등 여러 가지 형태로 서울이나 고향을 떠나 부산을 포함한 각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가시는 많은 분들을 만나 뵙고 나니,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팔자에도 없는 생경한 동네에서 터를 잡고 사시는구나 싶어 공감되기도 하고 속으로나마 외로움을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외롭지 않으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습니다만.
요즘 해수부의 부산 이전 이야기를 들으니 앞으로는 더 많은 분들이 저와 비슷한 마음으로 부산살이를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그들에게 제 진심이 가닿기를 바랍니다. 제가 살아보니 부산 이 동네 따뜻하고 즐겁고 맛있고 좋습니다!
여러분의 부산살이, 혹은 타지살이를 진심 담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