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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Nov 11. 2018

낯선 입학식

수줍은 순례자가 모여드는 곳, 생장 피드 포드


드디어 열차는 생장 피드 포르로 향했다.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탔다. 객차 두 개짜리의 몽땅 한 열차였기에 누가 타는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승객들은 모두 약속한 것처럼 간소한 옷차림에 단출한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제 제대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객실에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혼자였고, 그 누구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작은 열차였지만 행여나 불편을 끼칠까 저만치 멀리 떨어져 앉았다. 하나같이 홀로 앉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귓가에는 열차의 투박한 주행 소음이 반복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전공 교수님이 종강을 앞두고 내게 물었다. “여름 방학 에는 무얼 할 거죠?” “산티아고 순례를 떠날 거예요.” 그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젊은 친구가 왜 그런 데를 가죠? 거기는 노년 즈음에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 가는 곳 아닌가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언젠가부터 꼭 가보고 싶었거든요.” 멋진 여정이 될 거라며 응원해줄 거라 기대했던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날 의아하게 바라보던 눈빛. 의구심이 들었다. 교수님은 왜 산티아고를 노년에 어울리는 곳으로 여겼을까. 그의 말대로라면 세상에는 유년에게, 청년에게, 장년에게, 노년에게 어울리는 곳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창밖으로 지나가는 낯선 풍경들을 바라보며 자문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스물여덟의 내게 어울리는 곳은 어디일까. 혹시 어울리지 않는 곳을 가는 건 아닐까. 허나 교수님은 가보지도 않고 그럴 것이라 섣불리 정의 내린 것 아니겠는가. 나는 내게 어울리는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교수님처럼 단정 짓지도 않았다. 그래서 직접 부딪혀보기 위해 간다. 하지만 두렵고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난생처음 밟는 스페인이라는 낯선 대지, 두 발로 걸어내야 할 구백여 킬로미터의 길, 그리고 인내해야 할 한 달이 조금넘는 시간…. 잠시 후 구름 사이로 비춰오는 아침 햇살 때문인지 두려움은 이상하게도 모종의 설렘과 뒤섞였다. 


객실을 둘러보았다. 단출한 배낭을 곁에 두고 앉아 있는 예비 순례자들. 그들은 하나같이 침묵 속에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줍은 것 같기도,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나처럼 이곳까지 떠나온 자신만의 동기를 곱씹어 보는 걸지도 몰랐다. 이제 곧 낯선 세계에서 어딘가 나와 비슷한 그들과 함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터였다. 문득 익숙 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간 경험해왔던 숱한 입학식의 기억. 두려움과 동시에 설렘을 느끼며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던 지난날의 향수. 다시금 풋풋한 신입생이 된 기분이었다.


입학식. 익숙했지만 한편으로는 생소했다. 사실, 그동안 의 입학식은 능동적인 ‘의식’이 아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학생 스스로가 입학의 의사를 결정짓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모두 때가 되니 입학이 결정되어 있었고, 자연스럽게 입학식에 참석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어느 날 불현듯 스스로 입학을 결심했다. 누군가 등 떠 민 것도 아니었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의문의 눈총을 받으면서, 또 뻔한 고행의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잘해낼 자신이 있었다. 꼭 그러고 싶었다. 


마침내 도착한 생장 피드 포르. 이제는 도道를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곳곳에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파란색 팻말에 는 노란색 화살표가, 혹은 조개껍데기 형상이 올바른 방향 을 알려주었다. 이제 순례자는 이것만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머지않아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에 아기자기한 마을이 나타났다. 중세의 어느 순간에 시간이 멈춘 듯한, 언젠가 동화 속에서 보았던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단번에 제대로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작디작은 마을이었지만, 그동안 마주했던 그 어떤 곳보다 설렘과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출한 배낭을 짊어진 순례자들과 계속해서 마주쳤다. 기타를 챙겨 온 어느 순례자는 거리 한복판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마 방황과 젊음, 사랑 그리고 순례를 노래하고 있었으리라. 마을 곳곳에는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이정표가 눈에 띄었고, 산티아고 순례의 전설을 만든 성聖 야고보의 마네킹이며, 그의 상징인 조개껍데기가 즐비했다. 조그마한 성당에선 감미로운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온 마을이 내게 비격식적인 입학식을 치러주고 있었다. 나는 마치 저 먼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오래된 모험 이야기의 주인공, 어느 신화 속의 순례자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마치 저 먼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오래된 모험 이야기의 주인공, 어느 신화 속의 순례자가 된 것만 같았다. ©2015, leewoo










* 위클리 매거진을 통해 연재한 글이 출간을 했습니다. 미연재분을 포함 총 50개의 에세이가 엮인 산티아고 순례 에세이집 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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