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 함께 할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다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을 차례였다. 발급 절차는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신분증만 소지하고 순례자 사무소로 가면 되었다. “어서 오세요.” 미소를 띠며 반겨준 담당 직원은 일본인이었다. 동양인을 만나니 괜스레 반가웠다. 알고 보니 그녀는 순례를 이미 끝마친 순례자였고, 순례길이 좋아 이곳에서 자원봉사 중이라고 했다. 선배를 만난 셈이었다. 내가 물었다. 순례길이 어렵지는 않았냐고. 그녀는 중년인 자신도 무사히 끝마쳤다며, 나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선배에게서 발급받은 여권을 펼쳐보았다. 총 열네 페이지로 온통 여백뿐이었다. “순례길 위에 있는 마을에서 도장을 받을 수 있어요. 다 받을 필요는 없고, 적어도 그날 머무는 마을에서는 꼭 도장을 받도록 해요.” “도장들이 채워지면 멋진 기념품이 되겠네요.” 내가 미소 짓자 그녀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그냥 기념품이 아니에요.” 그녀는 이것이 있어야 훗날 산티아고에서 순례길 완주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순례자 여권이 있어야 숙소에 머무를 수 있으니 꼭 잘 챙겨서 다니라고.
그녀의 가르침 때문일까, 여권은 어느새 귀중품이 되어 버렸다. 노천카페로 향해 커피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자랑스레 여권을 올려놓았다. 웨이터는 여권을 보더니 순례자냐고 물었다. 그래, 내가 이런 사람이야. 괜스레 어깨가 으쓱했다. 하지만 가만 보니 웨이터는 내가 아닌 여권을 보고 나를 판단했다. 비단 이 순간뿐만이 아닐 터였다. 이제 이 여권을 내밀 때면 언제나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볼 것이었다. 이것이 신분증의 본질이었다. 신분증은 본래 한 개인의 정체성이 아닌 그저 귀속성歸屬性을 증명해줄 뿐이니까.
내게 얼마나 다양한 신분증이 있던가. 여권, 주민등록증, 학생증, 명함... 그리고 순례자 여권까지. 과연 이것이 나를 온전하게 대변해주었던가.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나보다 신분증을 더 궁금해했다. 효율성으로 움직이는 세상이기에,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어디 출신, 어디 소속만으로도 한 개인을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귀속성이 한 개인의 특성으로 여겨지는 세상에 서 언제나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효율적이지 않은, 구구절절함이 깃든 걸 찾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여권은 내게 껍데기처럼 여겨졌다. 하나의 굴레,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껍데기 말이다. 한 개인을 이 세상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이러한 껍데기가 아니다. 오히려 껍데기 속에 깃든 본질적인 그 무언가다. 여권 에는 여백이 가득했다. 모두 형형색색의 도장들을 찍어나갈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선배의 말마따나 도장은 그냥 도장이 아니었다. 도장은 발자취이자 고유한 경험의 징표였다. 이처럼 여권은 한 개인의 발자취를 담을 수 있기에 하나의 이력서履歷書가 된다. 이제 여권은 귀속성이 아닌 정체성을 대변한다.
생각해 보면 신분증 중 채울 수 있는 여백이 있는 건 여권뿐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을 위해서는 해외로 나가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다. 해외에 가지 않고도 자신을 깨우친 사람이 있다. 원효는 당나라로 유학길에 마신 해골물 한 모금에 깨달음을 얻곤 여정을 취소했다. 하지만 나는 단번에 깨달 아 성인聖人이 될 만큼 지혜로운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해골 물을 마시고도 당나라로 떠난 의상에 더 동질감이 든다. 그 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무작정 먼 이방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것은 빈 껍데기뿐이었다. 하지만 기회가 찾아왔다. 시대를 풍미했던 슬로건, ‘껍데기는 가라’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껍데기를 채워야 할 시대가 도래했다. 껍데기를 무엇으로 채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장소에서 도장을 찍느냐도, 또 얼마나 많은 도장을 찍느냐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도장에 묻은 유일한 경험과 땀방울 그리고 그때의 고유한 감정이다. 오직 그것만이 훗날 아직 껍데기뿐인 나를 대변할 수 있는 하나의 빛깔이 될 터이니.
* 위클리 매거진을 통해 연재한 글이 출간을 했습니다. 미연재분을 포함 총 50개의 에세이가 엮인 산티아고 순례 에세이집 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