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 Dec 08. 2018

순례자의 하루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의 소박한 일상

아직 어둠에 잠긴 시간, 알람 소리에 놀라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뜬다.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다섯 시. 이어 곳곳에서 알람 소리가 들린다. 순례자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다시 침낭에 몸을 묻지 않는다. “오 분만 더....” 하고 투정 부리는 이도 없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고 다그치는 이도 없었건만 서둘러 잠을 쫓는다. 아직 꿈으로 흥건한 얼굴로 부산하게 짐을 꾸리는 그들은 어딘가 겸허해 보이기까지 하다. 어느새 나도 그들의 템포에 맞춰져 있다. 


근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이른 새벽에 일어났느냐고? 이유는 간단했다. 때는 칠월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여름은 태양이 그야말로 작열한다. 햇살은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내며 대지를 뜨겁게 달군다. 그런 축복 아래 길을 걷는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진다. 자칫 잘못하다간 일사병에 걸릴 수도 있다.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양의 물을 짊어지고 다녀야만 한다. 무거운 짐에 짐을 더하는 것은 고난을 더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장 현명한 일은 해가 뜨기 전 충분한 거리를 걸음으로써, 태양을 최대 한 피하는 것이다. 


배낭은 다 꾸렸다. 하지만 곧바로 길을 나서지 않는다. 공복에 걷는다는 건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다. 몸을 혹사시키는 순례에서는 매 끼니는 물론 간식까지 잘 챙겨 먹어야 한다. 길을 걷는 것은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히 얼굴에 물을 묻혀 잠을 쫓아내곤, 전날 미리 준비해둔 음식을 주섬주섬 꺼낸다. 준비한 아침은 각양각색이다. 요거트, 인스턴트 커피, 초콜릿, 견과류, 그리고 사과와 바나나 같은 과일까지. 음식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으니, 요기는 금방 끝난다는 것이다. 


신발끈을 조이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배낭을 짊어진다. 순례길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는 저 어둠 속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이정표를 믿고 길에 나선다. 함께 걷는 친구와 소소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새벽에는 그리 많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벽을 닮은 침묵 속에서 묵묵히 걷는다. 습기를 머금은 오솔길을 가로지르는 발소리만이 들린다. 자박자박. 이제 친구들도 나도 각자의 속도로 나아간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순례자는 언제나 다시 마주치게 되어 있으니.


부단하게 걷는다. 아직 별이 총총이 뜬 새벽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걷는다. 지평선에서는 어느새 변화의 징후가 나타난다. 일출이다. 지난밤 마신 와인을 흩뿌린 듯 하늘이 붉게 물든다. 태양이 펼치는 색의 향연을 넋 놓고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는다. 아침이다. 아직 햇살은 따스하고 부드럽다. 온 세상을 싱그럽게 비춘다. 이내 발걸음도 경쾌 해진다. 걷다 보면 길 저 편에 어김없이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마주하는 첫 번째 카페는 꼭 들러야 한다. 바로 이곳에서 아침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카페의 문을 연다. 진한 커피 향기와 위장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겨온다. 카페라테를 주문한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커피는 선물과도 같다. 하지만 커피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때에 따라 다르지만 샌드위치나 오믈렛 혹은 크루아상도 곁들인다. 카페를 지나쳐서 안 되는 이유는 비단 아침 식사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을 열면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반긴다. 때로는 야외 테라스에 앉아서 아침을 먹다 보면 저 멀리서 친구가 손을 흔들며 걸어오기도 한다. 


꿀 같은 휴식과 아침 식사도 잠시,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나선다. 이제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묵묵하게 걷는 일만 남았다. 점심시간 이후에는 걷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 는 것이 현명하다. 정열적인 스페인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곧바로 내리쬐기 때문이다. 스페인 사람들도 이 시간대는 피한다. 그것도 공식적으로 말이다. 그들은 시에스타라는 불문율에 가까운 낮잠 시간을 만들어 더위에 대처한다. 하지만 순례자가 일상을 살아가는 토착민들의 템포에 맞출 수는 없는 일이다. 시에스타에 걷는 시간을 줄이려면 별 수 없다. 부단히 걷는 수밖에. 


점심시간에 맞춰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카페와 식당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걸어야 한다. 부지런히 걸으면 점심시간 전후로 해서 이십 킬로미터 정도를 주파할 수도 있다. 순례자들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평균 이십 킬로미터, 고된 날은 사십 킬로미터 정도이다. 점심 식사와 함께 그날의 일과가 끝나는 날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날도 있다. 점심 이후에 걷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과의 싸움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땀을 쏟아내며 걸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순례자는 포기하지 않고 걷는다. 


하루의 여정은 보통 염두에 두었던 마을에 도착하면 끝이 난다. 거리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무리해서 걷지 않는 이상 대개 다섯 시를 넘지 않는다. 이제 순례자가 하루의 일 과를 마칠 수 있는 숙소, 알베르게를 찾을 차례다. 알베르게에 들어가면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게 된다. 길 위에서 같이 걸었던, 앞서 갔던 친구들이다. 물론 그들과 함께 도착할 때도 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뒤쳐져 있던 친구도 웃으며 알베르게로 들어온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는 것이다. 이제 휴식시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배정된 침대 맡에 간소한 여정을 풀고, 샤워를 한다. 땀으로 젖은 옷들을 스스로 세탁한다. 빨래의 물기를 짜낸 다음 햇살 아래 널어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산뜻한 기분으로 입어도 될 만큼 보송보송하게 마른다. 이럴 때는 작열하는 태양이 고맙기도 하다. 드디어 자유시간이다. 이제 마음 편히 낮잠을 자거나 잔디밭에 누워 휴식을 취하면 된다. 


사실 점심시간에 맞춰 여정이 끝나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보통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것은 평균 두세 시, 때문에 여정을 풀고 나면 어느새 저녁 시간이다. 알베르게 근처 에는 언제나 식당이 있다. 식당이 없으면 알베르게가 식당을 함께 운영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저녁을 해결하면 된다. 그렇다고 매일 식당에 가지는 않는다. 순례자들이 다 함께 모여 요리를 해 먹기도 한다. 상점에 들러 간단한 식재료를 준비해 간단하지만 원기를 보충할 수 있는 건강한 저녁을 만들어 먹는다. 와인과 맥주도 빠지지 않는다.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조촐한 술자리가 이어지기도 한 다.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순례길의 잊을 수 없던 순간들, 혹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하기도 한다. 이따 금씩 알베르게에 기타가 구비되어 있다면 조촐한 파티가 벌어지기도 한다. 함께 노래 부르고, 어깨동무를 하고, 우정을 나누며, 심심찮게 사랑의 감정을 싹 틔우기도 한다. 아쉽게도 순례자의 파티는 일찍 저문다. 이른 새벽부터 몇십 킬로를 걷고 나서 밤늦게까지 제정신으로 있기란 힘든 일이니 말이다. 


보통 저녁 아홉 시, 늦어도 열 시쯤엔 모두 침대 위에 눕는다. 그리고 머지않아 조그마한 공간에 불이 꺼진다. 창밖에서 노란 가로등 불빛만이 창가를 통해 비스듬히 비춰올 뿐이다. 이내 사람들은 코를 골기 시작한다. 고단함과 나른 함에 뒤척이는 소리도 들린다. 손전등 아래에서 사각사각 일기를 써나가는 소리도, 휴게실에서 타닥타닥 타자 치는 소리도 들린다. 참, 이건 내가 내는 소리다. 하지만 밤은 영원하지 않다. 서둘러 잠에 들어야 한다. 침대에 누워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스르륵 잠에 빠져든다. 순례자의 소박한 하루는 이렇게 저문다. 




순례자의 소박한 하루는 이렇게 저문다 ©2015, leewoo













* 위클리 매거진을 통해 연재한 글이 출간을 했습니다. 미연재분을 포함 총 50개의 에세이가 엮인 산티아고 순례 에세이집 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이전 06화 부엔 카미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