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도 엄마가 있으니까요
나는 모범생이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착상한 후 배아가 태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순서대로 줄줄 읊을 수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성행위에 대해서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처음 알았다. 그렇지. 물고기처럼 정자와 난자를 한 줌씩 꺼내서 공기 중에 흩뿌리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선행 과정이 있을 텐데, 어떻게 수정 이전의 과정을 궁금해한 적조차 없었을까.
알고 나니 신기했다. 아이를 낳은 모든 부부는 성행위를 한 거였구나.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나도 그렇게 태어났구나. 동시에 어이가 없었다. 사람 수만큼 흔하고 일상적인 행위를 어째서 그토록 쉬쉬하며 무섭고 더러운 것으로(주로 주위의 어른들), 혹은 지극히 아름다운 환상으로만(주로 영화나 소설) 치부할까. 어째서 누구도 어린 나에게 담백하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 ‘성’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그랬다. 이를테면, 생리 중에는 꼭 급똥 직전처럼 아랫배가 묵직하게 아프다. 온종일 급똥 직전이니 당연히 짜증과 초조가 목 끝까지 차 있다. 그러나 아픔에 대처하는 방법보다 먼저 배운 건 생리 중이라는 걸 들키지 않는 자세였다. 겉옷에 생리혈이 묻지 않게,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생리혈 냄새를 맡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물을 많이 마시면 피가 많이 나올 테니 생리 중에는 목이 말라도 참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더럽고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다. 생리로 인한 괴로움은 이성 앞에서 열심히 숨겨야 할 무엇이었다. 누구도 피로 축축한 나에게 정확한 위로를 해주지 않았다.
임신과 출산, 육아도 마찬가지였다. 숭고한 신비주의 뒤에 숨은 임신의 증상들을 명확하게 배운 적 없었다. 무지했으므로 몸에 닥치는 모든 통증이 불안했다. 나는 아팠고, 아프다. 임신도 아팠고, 출산도 아팠고, 지금도 손목과 손가락과 어깨와 허리가 매일 돌아가며 아프다. 아기가 귀하다고 아기로 인한 아픔까지 기쁘지는 않다.
모성애가 위대하고 신성한 것이라고만 치부되는 게 싫다. 힘들다고 투덜대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 손이 입을 틀어막는 것 같았다. 저출생 시대의 역군이라거나 애국이라는 시선에 이르러서는 울화가 치밀었다. 칭송은 필요 없다. 배가 불러와 혼자 신기 힘든 양말을 신겨주는 손길이 고팠다. 따뜻한 엄마 밥과 남편이 설거지하는 뒷모습이 주는 구체적인 격려가 필요하다.
그리고 돌연 마주한 몸과 마음의 고통을 덜어줄 적확한 공감을 원한다. 자신도 그랬다고, 실시간으로 닥치는 불안과 외로움과 걱정과 두려움과 불만과 피곤과 통증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나쁜 엄마라는 증거가 아니라고 토닥여주는 말들. 이러저러그러요러한 일들이 있었으나 결국은 건강한 아기를 낳아 별 탈 없이 키우고 있다는 말들. 나는 인터넷 속 육아 선배들의 경험담에서 그런 말들을 찾아 활자로 읽거나 엄마와 마주한 식탁에서 어렸던 나를 키운 이야기를 들으며 자잘한 절망과 이유 모를 열등감을 달랬다.
만날 극락과 나락을 오가며 허덕이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우리 딸은 애 안 낳았으면 좋겠어.”
그런 삶을 살 수도 있겠지.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문득 생각했다. 혹시 딸이 후자를 택한다면 내가 이러저러그러요러했다는 경험담도 딸에게 공감과 정보와 위안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태교용 클래식을 틀어놓고 우아하게 뜨개질하는 환상 속 임산부, 유행 중인 육아법을 마스터하여 영재 만들기 플랜을 가동하는 갸륵한 어머니와는 다른 엄마도 나름의 방식으로 아기와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니, 그 어떤 신화에도 기죽지 말라는 응원.
전자를 택하거나 나의 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읽더라도 엄마가 되기를 선택한 다른 이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겠지. '엄마'라는 흔하고도 절절한 존재가 겪는 일들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그이에게 크게 유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통과한 엄마를 가진 딸이고 아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