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by 시애

입덧 지옥에서 벗어나고 나니, 세상이 평화롭다. 지금처럼 느슨하고 편안한 날들은 짧겠지. 다시 오지 않겠지. 하루하루가 가버리는 게 날마다 아쉽다. 비록 시시때때로 아프고 임산부라 못 하는 것도 많지만, 출산 이후에는 아이 걱정 없이 나를 챙길 수 있는 시간이 당분간 없을 테니까. 모든 날 모든 순간 나와 동생을 걱정하시는 부모님을 보면 자식을 생각하지 않는 삶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도 같다.



그전에 달콤한 기억을 많이 저장해 두고 싶다. 아기를 돌보다 지쳐 당 떨어진다 싶을 때 하나씩 꺼내 먹을 수 있도록.






난데없이 스윽, 갈무리해 둘 추억을 만들 기회가 다가왔다. 11월 말에 갔었던 도서관 책 축제 이벤트에서 1등에 당첨된 것이다! ‘1등’이라 적힌 쪽지를 펼치자마자 자못 심각하게 “이거 진짜예요?”라고 주최 측에 물었다. 당연히 진짜였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급격히 회복하였으며, 1등 상품은 ‘오션뷰 풀빌라 숙박권’이었다.


우와. 무려 풀빌라구나. 양수가 데워지면 안 되므로 욕조 안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체감 500년 전). 샤워 말고, 뜨거운 물에 몸 좀 푹 담가 봤으면. 미지근한 물은 괜찮다는데, 뜨끈하지 않은 물은 노곤노곤해지지 않으니 의미가 없어요. 그래도 풀빌라의 노천 온수 풀에는 들어가고 싶어서 수영복을 챙겼다. ‘온수’ 풀이니까 괜찮겠지? ‘온천’이 아니니까 덜 뜨겁겠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꽃자주색 비키니로 갈아입었다. 물에 손을 살짝 담가보니 역시 뜨겁지 않다. 조심스레 물속에 들어갔다. 몇 달 만에 온몸으로 느끼는 꽉 찬 물의 감촉. 볼에 와닿는 1월의 바람이 차가웠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눈앞에 바다와 하늘이 가득 펼쳐졌다.



저녁 메뉴는 목살구이와 월남쌈이었다. 남편은 베란다의 노을을 배경으로 고기를 굽고, 나는 바다가 보이는 부엌에서 채소를 썰고 물을 데웠다. 접시를 꺼내 통창 가득 바다를 마주 보는 식탁에 앉았다. 따끈한 물에 불린 라이스페이퍼에 양배추와 당근과 파프리카와 새싹 채소와 파인애플과 고기 한 점을 싸서 칠리소스와 땅콩소스를 듬뿍 찍은 후 입에 넣었다. 아삭아삭아삭 소리의 생기가 흐뭇했다.



저녁상을 물린 후에는 폭신하고 찰진 이불에 파묻혀 만화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뜨니 파도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창밖에 귀 기울이다가, 화장실이라도 다녀와서 다시 잘까, 하고 일어섰더니, 커다란 창 너머에 바다와 달이 있었다. 절묘하게 아름다운 달과 달빛을 담은 물결이 일렁이는 새벽의 바다. 아. 이건 불가항력이다. 의자 하나를 창 가까이 옮겼다. 거기 앉아 그믐달이 서서히 기울고 하늘이 붉고 푸르게 물들다 해가 뜨는 바다를 꼼짝없이 지켜보았다.



아침 식사는 풀빌라 바로 옆 카페에서. 눈부신 윤슬을 앞에 두고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오션뷰로 유명한 대형 카페인데, 풀빌라 숙박객에게는 카페 오픈 시간 전에 조식을 제공한다. 커다랗고 텅 빈 카페를 둘이 독차지할 수 있는 잠깐이 한껏 즐거웠다.





우선, 지쳐서 온기가 필요할 때 꺼내 재생시킬 달달한 기억에 풀빌라에서의 1박 2일 추가.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설탕에 켜켜이 묻어야지,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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