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귀한 보물, 나의 봄
강아지 크기의 사람 한 명이 담겨 있다는 게 믿어질 만큼 배가 부풀었다. 근래에는 자다가 화장실에 자주 가는 것보다 잠이 드는 것 자체가 더 버겁다. 천정을 보고 똑바로 누우면 숨이 찬다. 배가 무겁다. 옆으로 돌아누우면 배가 옆으로 쏟아지는 느낌이다. 뱃가죽이 땡땡 아프다. 계속 부풀고 있는 물풍선이 된 것 같다.
게다가 똑바로 눕든, 옆으로 눕든 아기가 냅다 차는 건 매한가지다. 밤에 자려고 눕기만 하면 태동 아니라 태권도 수준으로 연속 걷어차기를 시전하는데, 왜 이러는 걸까요. 딸꾹질하는 것까지는(그렇다. 태아도 딸꾹질을 한다. 처음엔 태동이 너무 규칙적이어서 뭔가 잘못된 줄 알았다.) 귀엽게 여길 만한데, 팔 연속 휘젓기나 발길질 콤보는 좀 아프다. 배가 꿀렁꾸-울렁하는 게 잠옷 위로도 보인다. 그나마 내가 품고 있는 아기는 역아라서 아랫배만 차는데, 정상적인 위치의 아기들은 위장이나 명치 부근을 걷어찬다지. 해맑은 발길질에 갈비뼈가 부러지는 산모도 있다던데.
누워서 잠드는 데 실패하고 의자에 기대어 졸면서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다고 나를 치하한다. 그래. 수고했지. 소파에 널브러진 채 숙취 같던 입덧을 종일 버티기도 했었지. 하루에도 몇 번씩 출혈은 없는지 속옷을 살피기도 하고, 아랫배가 콕콕 쑤시는 작은 아픔마저 태산 같이 걱정하기도 했었고. 어쩌다 젖가슴이 조금 덜 아프면 (또 다른 의미의) 가슴이 철렁했더랬지. 이번에도 아이를 잃을까 불안해하던 밤과 낮들.
주위 사람들에게 섣불리 알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임신했다는 소식만 듣고 유산한 사실은 알지 못하는 이들이 웃으며 건네던 안부 인사가 어찌나 착잡하던지. 아기 잘 있어요? 아니요. 아기도, 나도 잘 있지 못해요. 그러나 현실은 억지웃음을 섞어 유산했다는 근황을 설명한 후 지금은 괜찮다고 말하며 마무리. 하나도, 무엇도 괜찮지 않았는데.
초·중기 유산 걱정이 사그라들자 조기 출산 걱정이 시작되었다. 대학병원에 정기 검진을 갈 때마다 태아가 작다고 했으니 되도록 내 안에서 오래 키워야 한다. 아랫배가 사르르 조여올 때마다 화들짝 놀라 드러누웠다. 안 돼. 벌써 나오면 안 돼. 지금 이게 출산 신호이면 안 돼.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어떤 예감 같은 것이 있었다. 늦게 낳지는 못하리라. 크게 낳지도 못하리라. 그래서 더 간절했다. 조금만 더 있어. 더 커서 나와. 2.5kg이 넘으면 인큐베이터에서 크지 않아도 된대.
어째 불안하다 했지. 35주 정기 검진에서 의사 선생님이 차분히 말씀하셨다. 빨리 낳자고. 양수가 모자란다고. 오만 가지 상황에 늘 괜찮다고 말씀하시던 분이 빨리 낳자고 하시는 걸 보면 정말로 낳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가 보다. 딱 37주가 되는 날 오후 제왕절개 수술을 하기로 했다. 예정일보다 3주 앞이다. 양수가 모자라 아기가 힘들까 싶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마음이 급해졌다. 미리 싸두었던 출산 가방을 도로 열어 챙겨둔 것들을 톺아 보았다. 아기방에 정리해 둔 가구와 서랍장을 다시 훑고, 유튜브로 공부하며 메모한 파일도 꺼내서 거듭 읽었다. 신생아용 젖병과 기저귀를 꺼내고, 보건소에 전화를 걸어 유축기 대여를 신청했다. 미뤄두었던 아기용품 빨래를 한꺼번에 했다. 손톱과 발톱을 깎고, 머리를 잘랐다. 긴 시간 먹지 못할 예정인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었다. 오래 못 보던 친구를 만났다.
문밖에는 봄이 한창이었다. 장미가 피어날 때일 줄 알았더니 벚꽃이 만발하는 때에 너는 태어나겠구나. 해마다 가장 봄다운 시기에 네 생일이 오겠구나. 매년 벚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나는 이 봄을, 나의 보물을 만난 때를 떠올리겠구나.
어쩌면 아기의 존재 자체가 내게 봄인지도. 마흔 목전. 임신을 알기 전에는 내 생애 봄날이 벌써 훨훨 다 가버린 기분이었다. 인생은 길고 마흔은 아직 청춘이라지만, 나는 아직 마흔 해밖에 살아보지 않았는걸. 마흔이 보는 마흔은 더는 어리지도, 젊지도 않은걸. 그런데 다시 훈풍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아기와 살게 될 삶이 무섭고 두렵고 설렌다. 궁금하다. 귀여우려나. 행복하려나. 벚꽃의 시간만큼 눈부시려나.
37주 0일, 2.2kg의 딸. 나의 새로운 시작. 다시 봄. 쿵쿵, 가슴이 먼저 아기에게로 뛰어가고 있어. 지금의 태동이 곧 그립겠지. 건강하게 보자. 이미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