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알라 Aug 13. 2023

회사는 그저 돈 버는 곳일 뿐?!

-비가 오니 생각나는 막창 그리고 신 대리님.

 나는 콕 찝어 '하고 싶은 일'이 없었고, 뚜렷한 꿈도 없었다. 

중화권 문화를 좋아해서 중국어를 전공했고, 중국어가 좋아 집에서 반대하는 중국 유학도 다녀왔다.

통역사가 되고 싶었지만 통역사가 되려면 대학원 진학을 해야 했는데, 그러기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

아니다. 집안 사정은 핑계고 사실은 통역사가 되고자 하는 그만큼의 열정과 인내까진 없었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중국어'는 정말 제2외국어뿐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영어'가 필수 요건인 회사가 대부분이었고, '중국어'는 '필수 요건'이 아닌 '우대 사항'일뿐이었다.

취직 준비를 하면서 진지하게 내가 원하는 직무가 무엇인지, 어떤 회사에 입사하고 싶은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굳이 알아야 되나? 설령 알게 된들 원하는 곳에 취직할 능력과 시간이나 있나? 그냥 취직만 하자.'

머릿속엔 온통 잉여로운 일상에서 벗어날 생각만 할 뿐이었고, 몇 군데의 면접 끝에 이전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면접 봤던 그날이 14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또렷이 기억난다.

 "어? 중국어 전공했네? 니하오마?"

몇 번의 면접에서 아무도 '중국어 전공'이라는 점에 호의적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내 전공을 보곤 반기며 농담까지 하시는 인사팀장님의 모습에 긴장이 풀렸었다.


 "우리 회사가 중국 톈진에도 공장이 있어서 자주 중국인 직원들이 한국으로 출장 오거든요. 그럴 때마다 통역이나 번역 가능하겠어요?"


 "네, 중국 유학시절 다수의 중국인 친구들과 함께 지낸 경험도 있어 회화나 독해, 작문 문제없습니다."

 '원래 면접은 뻥튀기 아니겠는가? 문제야 닥치면 그때 생각하기로 하자.'


 면접을 끝내고 회의실 문을 나가려는데, 인사팀장님이 인사팀 과장님께 전하던 말이 나에게까지 들렸다.

 "나 얘 마음에 들어, 바로 대표이사 최종 면접 일정 잡아."

당시엔 비밀스럽게 소곤대는 인사팀장님의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려오자 '작게 말해도 다 들리는데... 모르시나 봐.'라며 인사팀장님의 허술함에 피식했지만, 입사하고 인사팀장님 밑에서 일해보니 이 사람은 몸은 곰이지만 머리는 확실히 여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절대 남에게 내비치는 법이 없고, 늘 팀보다는 '본인'에게 어떤 선택이 더 이득인지를 따지는 사람이었다. 

 기분이 언짢으면 얼굴에서부터 티가 팍팍났던 내게 팀장님은 늘 '포커페이스' 하는 법을 배우라며 조언했다.

사회초년생일 때는 하염없이 단점만 보이던 팀장님이었는데, 간혹 맞는 말도 했다 싶다.


아마 일부러 나에게 들릴 정도로 본인 목소리 데시벌을 설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알아서 다음 면접 준비하고 있으라고.


최종 면접인 대표이사 면접은 별 거 없었다.

말하는 걸 좋아하는 대표이사는 1시 간의 면접 시간 중 본인 얘기를 50분 했다.

관상으로 합격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본인 자랑만 했다. 




 인사팀장님은 구매팀장 직무를 겸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팀엔 구매팀 대리님 1명, 인사팀 대리님 1명, 구매/인사 신입사원 나 이렇게 총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면접관으로 나의 면접에 참석했던 인사팀 과장님은 내가 입사하기 하루 전 퇴사했다고 한다.


 "배고프면 탕비실에서 과자 한 두 개 꺼내 먹어요."

 인사팀 대리님은 참 유머러스하고 다정했다. 

 긴장해서 얼어있는 내게 초코하임을 건네며 '비품관리'하는 우리 팀의 특권이라며 언제든 탕비실 다과용 과자를 꺼내 먹으라 했다.

 그로부터 14년 내내 배고플 때마다 돈 주고 사 먹기엔 아까운 박스포장 과자들을 꺼내먹었고, 지금은 박스포장 과자들엔 질려버려 오로지 봉지 과자만 사 먹고 있다. ex) 새우깡, 꼬깔콘, 꿀꽈배기, 콘칲 등등...


 인사팀 대리님은 신입 사원 시절 나의 구세주였다.

집은 멀지만, 차가 없는 날 위해 우리 집까지 환승 없이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오는 버스 정류장까지 늘 데려다주었다. 말이 쉽지 매번 퇴근 시간이 다른 나를 챙긴다는 게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마운 마음에 주유 상품권을 몇 번 건넸는데, 아주 앙칼지게 집어던지며 "또 이런 거 주면 다신 너 안 태워줘!"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자기 월급도 얼마 안 되었음서 쎈 척은...


 감당하기 힘든 업무를 맡아 끙끙대고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맥심 커피믹스 한 잔을 책상에 슬쩍 올려주며,

 "야. 쉬엄쉬엄 해. 너 그러다 머리 다 빠져. 얼른 끝내고 치킨이나 먹으러 가자"

 라며 나를 기다려주었고, 처음이라 힘들었던 직장 내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언제나 따뜻한 조언을 해주었다.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품질팀으로 강제 부서전환이 되고, 품질팀으로 첫 출근하던 날도 대리님은 나보다 먼저 품질팀 사무실에 와있었다.

 "여기 좀 춥네요? 개인 히터 하나 신청해야겠어. 너 히터 없지? 내가 주문해 줄게."

볼펜, 메모지, 키보드, 마우스 등 제대로 갖춰졌는지 한참을 확인하곤 "점심시간에 보자"라며 쿨하게 품질팀 사무실을 나가던 대리님의 뒷모습이 참 든든했다.


 입사하고 몇 년 뒤, 인사팀 대리님은 대학시절부터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했다.

여러 남자 못 만나보고, 한 놈 하고만 사귄 게 원통하다며 나 보고는 많은 남자를 만나보라는 조언을 끝으로 대리님은 유부녀가 되었고, 돈 벌어야 하니 자녀는 천천히 갖겠다 놓고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어 왔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인사팀에 공석이 생겼고, 대리님의 추천으로 입사한 지 3년 만에 품질팀에서 인사팀으로 다시 복귀했다. 품질팀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었었는데, 이런 나를 염려해 추천까지 해준 대리님이 고마웠다.


  하지만 나의 부서 전환이 복직 후 대리님에게 불러올 파장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육아휴직 복직 한 달 전, 대리님이 양손 가득 비타 500을 들고 인사차 회사에 방문했다.


 "신 대리, 나랑 얘기 좀 할까?"

인사팀장님이 대리님만 따로 불러 회의실로 갔다.

2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회의실에서 나온 대리님의 표정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감정인 듯 미간은 일그러져 있고, 입꼬리는 어색하게 올라가 있었다.


 "팀장님이 뭐래요?"


 "아~ 나 인사팀으로 복직은 어려울 거 같대."


 "네? 왜요? 저한텐 분명 지금 급여 아웃소싱 주고 있는 업체랑 계약 종료하고, 대리님이랑 나랑 둘이 그 업무를 나눌 거라고 하셨는대요?"


 "영업팀에 새로 온 대리님이 퇴사하신대. 그래서 지금 인사팀엔 인원이 넘쳐나고, 영업팀엔 인원이 부족하다며 사장님이 나보고 영업팀 소속으로 복직하랬대."


 "네? 넘쳐나긴 뭐가 넘쳐나, 나랑 팀장님 이렇게 둘 밖에 없고만... 그래서요?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라서 할 수 있을 거래. 뭐 어쩌겠어. 내 의견 묻는 게 아니고 저건 '통보'야 '통보', 너 품질팀으로 부서 전환 했을 때처럼." 


'아, 나만 아니었다면.'
내가 인사팀으로 오지만 않았다면, 내가 품질팀에 그대로 있었다면 대리님은 원직 복직할 수 있지 않았을까?



"oo아! 나 지금 회사 정문에 와 있는데, 좀 나와줄래? 혼자 들어가려니 뭔가 이상해, 못 들어가겠어."

복직 전 인사 오던 날 아침, 늘 당당하고 거침없고 유머러스했던 대리님이 회사 앞에서 쭈볏대다 나에게 전화했다. 낯가림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왜 그래요? 다른 사람처럼?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모르겠어. 갑자기 좀... 뭔가... 눈치까진 아닌데... 복직하려니 어색하고, 주눅 들고 그러네."


 "주눅 들 게 뭐 있어! 하던 대로 해요! 왜 이래요? 대리님 이러면 나 슬퍼진단 말이에요!"


 "뭘 또 슬퍼지냐! 어휴 넌 하여튼 오바야 오바!"

 회사 오던 발걸음이 무거웠다던 대리님은 더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남녀고용 평등법 : 제19조(육아휴직)

 ③ 사업주는 육아휴직을 이유로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되며, 육아휴직 기간에는 그 근로자를 해고하지 못한다. 다만, 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④ 사업주는 육아휴직을 마친 후에는 휴직 전과 같은 업무 또는 같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는 직무에 복귀시켜야 한다. 또한 제2항의 육아휴직 기간은 근속기간에 포함한다.


 내가 불리한 일을 당했을 땐 '그럴 수 있지 뭐'라며 넘겼지만, 나의 동료가 당한 불리한 처우는 참지 못했다.

대리도 뭣도 아닌 사원 주제에 곰 같은 여우인 팀장님께 한껏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팀장님, 신 대리님 복직 건이요. 법에 위반되는 거 아니에요? 육아휴직 전과 같은 업무로 원직 복직시켜야 한다고 나와있더라고요..."


 "이 봐! 정 사원,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그런데 사장님이 완강해. 나도 얘기해 봤어. 네 맘은 뭔지 알겠는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신 대리님이 영업 업무에 적응 못하면 어떻게 해요...?"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본인이 알아서 판단해서 그만둬야지."




 영업팀 국내영업파트로 복직한 대리님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늘 분주했다.

매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해외/국내 메이저 업체들에 밀려 미납이 수두룩한 담당인 소규모 국내업체들의 제품을 조금이라도 빨리 납품하기 위해 사무실보다는 현장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고, 당연해졌다.


 대리님은 현장에서 제품이 완성되길 기다리며, 바쁜 작업자를 대신해 T 연마를 하거나, R 가공도 했다. 

그렇게 제품이 완성되어 포장반으로 옮겨져도 다른 업체 제품들에 밀려 '포장 대기' 상태로 한쪽 구석에 몇 시간 방치되었고, 지체할 시간이 없던 대리님은 작업용 장갑을 끼고 포장까지 본인의 손으로 해내기 시작했다.

 

 "신 대리, 제품 나왔어. 포장해~"

어느새 제품 포장은 당연하다는 듯 대리님의 일이 되었다. 


 "이래서 손 대면 안 되는 거였는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놔뒀어야 했는데... 내 죄다 내 죄야."

책임감이라고 해야 할까? 미련하다고 해야 할까?

늘 "내 일이니까 내가 해야지."를 입에 달고 살던 대리님은 힘들지만 이 악물고 버티며, 인사팀 대리로 있을 때와 영업팀으로 부서 전환 후 태도가 달리진 회사 사람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다 했다.


 어느 날, 아무리 바빠도 자료 정리를 위해 오후 5시면 자리에 앉아있던 대리님이 5시 30분 퇴근시간이 되었는데도 자리에 없었다.

걱정되어 현장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지만 보이지 않았다.


 "신 대리, 지금 창고 안에 있어."

 구매 물류창고 담당 반장님이 대리님의 위치를 알려줘 창고로 가보았다.

 불 다 꺼진 창고 안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있는 대리님을 발견했다.


 "대리님! 불 다 끄고 여기서 뭐해요?"


 "......"


 "왜 그래? 뭔 일 있었어요?"


 "업체에서 물건 이렇게 안 주면 물량 빼버리겠다고 욕을 욕을 하길래, 팀장님께 보고 했는데 도와주려고 하시긴커녕 이 정도도 해결 못하면 그만두래."


 "네? 김 대리 담당 해외 업체에 미납 한 건이라도 생기면 생산팀에 직접 내려가서 물건 빨리 달라고 소리소리치던 그분이요?"


 "응, 날 싫어하나 봐."


 밝고 강단 있던 대리님이 풀이 죽어 있었다.
내 탓 같았다.
나만 인사팀에 오지 않았어도...
대리님이 돌아 올 원래의 자리만 그대로 있었어도...



 "아니에요. 그냥... 매출 얼마 안 되는 작은 업체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말한 걸 거예요. 알잖아요. 영업팀장님 매출에 민감한 거."


 "나 이제 고작 3개월 밖에 안 됐는데... 복직하고 영업 업무 시작한 지 3개월밖에 안 됐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아니면, 인사팀장님께 면담요청해서 인사팀 차원에서 개선해 줄 수 있는 사항들은 없을지 물어보시는 건 어때요?"


 "인사팀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리님 일인데... 설마 아예 모른 척하겠어요? 인사팀장님 되시고 대리님께 도움 많이 받았던 팀장님인데?"


 "그럴... 가?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렇지?"



 2009년 4월, 나의 입사를 축하하기 위한 부서 회식이 있었다.

구매팀 업무만 해오다 이번에 처음으로 인사팀 업무를 하게 된 팀장님은 원래부터 인사팀 소속이었던 대리님께 아주 살가웠다. 

 

 "신 대리, 내가 인사팀은 처음 맡아봐서 말이야. 앞으로 우리 잘 지내보자."


 "네, 저도 잘 부탁합니다."


 "팀장님! 오늘 oo이 입사 축하자리 아니에요? 왜 자꾸 신 대리하고 인사팀 업무 얘기만 하세요?"

회식 내내 대리님에게 업무 관련 질문만 해대는 팀장이 꼴사나웠는지 구매팀 대리님이 참다 참다 한 마디 했다.


 "oo 씨는 신 대리 하는 거 보고 잘 배워 둬, 우리 회사에서 일 잘한다고 소문났으니까. 난 신 대리 없었음 어쩔 뻔했나 싶어. 끝까지 남아줘서 진짜 고마워."


 입사 전, 한 바탕 정리해고와 희망퇴직으로 어수선했던 와중에 인사팀에서 유일하게 퇴사하지 않았던 대리님은 팀장님께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마지막 희망으로 대리님이 요청한 면담에서 인사팀장님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못 견디면 나가는 수밖에.'라며 완전 남 일이라는 듯 모르쇠로 나왔다.


 그때 처음으로 다짐했다.
'아무리 회사에서 돈만 벌면 된다지만, 정(情)까지 잃지는 말아야지."




결국 대리님은 복직한 지 6개월 후 퇴사했다.

돈 벌어야 해서 더 다녀야 했지만, 이렇게  필요 없는 사람 취급받으며, 마음 상하면서까지 일하고 싶진 않다고 했다.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제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애, 이 회사엔."


 "대리님, 죄송해요."


 "뭐가?"


 "제가 인사팀에 오지 않았다면..."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너 때매 얼마나 마음 편히 휴직에 들어갔는데! 그딴 소리야!"


 "그래도요. 계약직 채용했으면, 대리님이 인사팀으로 복직할 수 있었던 건데..."


 "난 한 번도 그런 생각하지 않았어. 그리고 사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게 좀 힘들기도 했어. 자꾸 짜증만 늘고... 그래서 그만두는 거니까 마음 쓰지 마."


 "저 대리님 없으면 회사 어떻게 다녀요? 누구한테 물어보고, 누구한테 하소연해요."


 "돈만 벌어. 마음 주지 말고. 다치는 건 너야. 나 보고도 모르니?"


 "......"


 "너 때문 아냐, 아직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 착해빠져선... 너 없었음 나 6개월도 못 버텼어."


 평소에 "네네"만 하며 주는 대로 받아가던 순해빠진 대리님은 "육아휴직 후 원직복직이 아닌 부서전환은 위반되는 사항이니 퇴직 위로금을 달라."라고 회사에 요구했다.

 평소였다면 말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악에 바쳐 그만두는 이상 '실속'이라도 챙겨가자 싶었다 한다.


 "신 대리, 설마 나 때문에 그만두는 거 아니지?"

마지막 출근 날, 영업팀장님은 농담 반 진담 반인 듯 웃으며 대리님께 말했다.


 "맞아요."


 "뭐?"


 "맞다고요. 그만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아니에요."라며 애써 웃어 보일 것 같은 대리님의 사이다 발언에 지켜보던 나도 속이 시원했다.




 "너 회사에 있을 때 경력증명서라도 미리 몇 장 떼어놓을 걸 그랬다야."

 올해 2월 1년에 한두 번 안부 연락은 주고받던 대리님이 먼저 연락 왔다.

 아이들의 학원비라도 벌어야 될 것 같아 재취직을 준비 중이라 했다.


 "그르게요, 진작 나 있을 때 그런 거 부탁하지."


 "거지 같은 회사 여적 망하지도 않는 거 보면 참 대단하다 대단해."

짠 듯이 퇴사한 사람들에게 이전회사는 '거지 같은 회사'로 통한다.


 "언니 우리 그때 냉장고 청소한 거 기억나요?"

 이제 신 대리님은 나에게 '언니'로 불린다.


 "그 딴 캐캐묵은 노예 시절은 그만 추억하고, 결혼이나 해. 이것아."

 언니의 말은 전혀 상처가 되지 않는다.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1년에 한두 번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1년에 한두 번이지만 우리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돈만 벌어가겠다던 대리님은 정작 회사에 있는 내내 사회초년생인 나에게 마음을 주었다.

대리님의 언행불일치덕에 힘들었던 회사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고, 심각한 와중에 웃을 일도 있었다.


회사가 돈만 벌면 되는 곳이라지만, 어쨌든 사람이 어우러져 생활해야 되는 곳 아니겠는가?


 비록 대리님은 떠나보냈지만, 훗날 내가 대리님 위치 정도가 된다면 후배 직원들에게 꼭 저런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입사 4년 차 때 다짐했었다.




 태풍의 영향으로 아침부터 굵은 비가 내린다.

비 오는 날엔 막창이라며, 퇴근 후 막창 먹으러 가자던 대리님이 생각났다.

대리님 생각만 하면 탕비실 냉장고를 청소하던 그날이 생각난다.


 "넌 좀 쉬어, 아까 싱크대도 네가 다 닦았잖아. 여기 앉아있어. 냉장고는 내가 할게."

궂은일은 인사팀 몫이었던 그 시절, 시키기보다 본인이 더 많은 궂은일을 하던 대리님에게 오랜만에 안부 연락을 해봐야겠다.



 








이전 11화 너에게 "그만둬버리지 뭐."라는 말의 의미는 뭐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