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되는 퇴사자가 된다면 그걸로 만족.
-과장님, 잘 지내시고 계세요? 이번 주 일요일에 박 과장님 보기로 했는데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봐요.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이틀 전, 재직 중엔 별로 친하지 않다가 퇴사 한 달 전 부서 통합으로 한 사무실을 쓰게 되면서 조금 친해졌던 이대리로부터 문자가 왔다. 이번 추석엔 일이 있어 고향에 가지 않는다 했다.
퇴사한 지 6개월이나 지났음에도 내가 보고 싶다 해주는 그녀의 말은 나를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둘이 봤다면 자칫 어색할 뻔했는데 서울로 이직한 나와 친한 박 과장과 함께 셋이 보는 자리라 부담이 덜 했다.
'어색함'이라는 감정이 갈수록 힘에 부쳐 웬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면 갖은 핑계를 대며 집에만 있으려 했는데, 이번엔 그러지 말자 굳게 다짐하고 약속일까지 수십 번도 더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았다.
사장님 히스테리가 날로 심해져 도저히 감당이 안돼요. 문득 과장님 생각이 나서 연락드렸어요.
과연 회사를 그만둔 외부인인 내가 얼마나 그녀의 하소연에 공감해줄 수 있을지 만나기 전부터 살짝 부담이 되었다. 자고로 회사 험담은 회사 내부인과 해야 제 맛이기 때문이다.
단지 들어주는 역할만으로도 조금은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을까 싶어 열심히 들어주고만 오자 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마디의 하소연을 하면 게거품 물고 열 마디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젠 나와 상관없는 회사의 말도 안 되는 상황들에 흥분했고, 마치 내 일처럼 화도 났다.
"과장님 또 화나서 밥 안 먹히나 보네. 밥 좀 드세요."
나를 너무나 잘 아는 박 과장은 전혀 줄어들지 않은 나의 텐동을 보며 진정하고 밥 먹으라며 어깨를 두들겼다.
내가 또 지나치게 감정 이입하는 바람에 이대리는 듣고만 있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저 작년에 이 회사 입사할 때 과장님이 저보고 우리 회사 대부분이 장기근속자라고 하셔 놓고, 과장님도 박 과장님도 다 올해 그만둬버리시는 게 어딨어요!"
"그래, 내가 그래 놓고 그만둬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나도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어."
그런데 있잖아, 사실 나도 내가 그렇게 정말 그만둬버리게 될 줄은 몰랐었어.
작년 8월, 몇 년째 지속된 과도한 업무들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이 극에 달해 사장님께 업무 재배치를 요청드리고자 면담한 적이 있다. 사장님은 너보단 사장인 내가 더 힘들다는 둥,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둥, 지금의 감정은 '일시적'인 거라 했다.
말도 안 되게 오히려 '팀장'으로 진급을 제안하며, 팀원 없이 사장님 소속으로 인사팀을 혼자 꾸려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을 할 뿐이었다.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단 한 번도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내 일이라 여기고 '하고 또 할 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속내를 내비쳤는데 사장님은 그걸 너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혹 떼려다 혹 붙이게 된 꼴이 되어버렸고, 붙잡고 있던 인내의 끈이 이때 끊어져버렸던 듯하다.
몇 년 전 회식자리에서 이사님이 몇십 분째 나를 붙들고 얘기하던 술주정인 듯 뼈 있는 한 마디가 떠올랐다.
"정 과장, 적재적소에 티 내고 생색내는 것도 능력이야."
내 일을 내가 하는데 무슨 생색이 필요하다는 거야. 말도 안 돼!
그 당시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던 이사님의 이 말이 퇴사를 확정하고 난 뒤 계속 생각났다.
나를 지치게 만든 건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엔 늘 이 말이 따라붙었다.
"이대리는 안 될 듯한 일을 사장님이 지시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NO라고 하더라. 그런데 사장님은 NO라는 말을 싫어해. 노력하면 안 되는 건 없다는 생각이 강한 분이셔. 그러니 업무를 지시하면 일단은 확인해 보겠다고 하고 NO가 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정리해서 메일로 보고하는 게 좋아. 그런 스킬이 좀 필요해."
"네,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렇게 한 번 바꿔볼게요."
이사님의 말을 흘려버렸던 나처럼 지금의 내 말을 그녀가 흘려버린데도 어쩔 수 없겠지만, 나는 온 정성을 다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 싶었다.
"걔들이 언제까지 너랑 놀겠니? 그만둔 회사 동료와의 관계는 최대 1년 안에 없어질 인연들이야!"
회사 후배들과 약속이 있다는 내 말에 엄마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마도 엄마는 지금은 활발히 나와 놀아주겠지만 서서히 각자의 생활이 바빠 연락이 끊기게 되면 혼자 남게 될 나를 걱정하는 듯하다.
"괜찮아. 지금 좋으면 됐지 뭐."
엄마가 뭘 걱정하는지 충분히 안다. 나도 그런 걱정을 안 해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갈 인연인지를 재고 계산하고, 차등을 두어 마음을 쏟는 건 머리 아파서 못하겠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련다.
나만 좋으면 그만인 '오늘'만 생각하기로 했다.
헤어지고 나서 나눈 문자에서 이대리는 오랜만에 만나서 회사 얘기도 하고 자기편에서 얘길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알려준 대처법도 잘 활용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에 또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이제는 그 어떤 교집합도 없어져버린 퇴사자들과의 만남에서 그녀가 얻어가는 것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그녀의 고단함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는, '오늘'은 그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