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알라 Jul 19. 2023

잘못된 업무처리지만, 퇴사자에겐 아무런 권한이 없다.

-또 거짓말과 모르쇠로 일관하는 후임자.

이대리 : 과장님, 잘 지내고 계시죠~? 연차수당 물어볼 거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는데...  너무 답답해서요.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구매팀 이대리로부터 카톡이 왔다. 

이대리는 질문이 있거나 하소연하고 싶지만 마땅히 할 때가 없을 때 가끔 연락 오곤 하는데, 이번 카톡은 질문과 하소연이 섞여있는 듯했다.


 : 너도 잘 지내고 있어? 물어볼 게 뭔데? 물어봐~

이대리 : 1년 미만 신규입사자는 15개 연차 외에 한 달에 1개씩 해서 1년에 총 11개의 연차가 추가로 더 발생하잖아요~

 : 그렇지? 우리 회사는 연차를 회계연도로 관리하고 있어서 내가 21년도 미 사용분에 대해선 22년 1월 급여에 '미사용 연차수당'이라고 항목 넣어서 연차수당 지급했지 싶은데?


참나, 그만둔 지가 언젠데 아직 '우리 회사'라고 표현하는지 나도 참 모지리 중의 상모지리다.


이대리 : 맞아요. 예전에 과장님이 저한테 설명해 주셨었어요. 제가 입사 월이 6월이라 회계연도로 잘라서 일부만 지급했으니, 11개의 연차 중 사용하지 않은 나머지 연차는  그다음 해에 수당으로 지급될 거라고 하신 것도 제가 똑똑히 기억하거든요.

 : 그렇지? 우린 미사용 연차는 무조건 수당으로 지급하고 있으니까? 

이대리 : 그런데 이번에 연차수당이 적게 들어왔길래 정대리한테 물어봤더니 11개짜리 연차는 안 쓰면  소멸되는 거래요.

 : 으잉? 소멸? 우리 회사에 소멸되는 연차는 없는데? 연차촉진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사업장이 아니라서.

이대리 : 아니래요. 15개짜리 연차는 수당으로 지급하는데, 1년 미만 신규입사자한테 지급되는 11개짜리 연차는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된다고 그렇게 인수인계받았대요.


갑자기 혈압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후임자가 또 내 이름을 팔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 이대리, 나는 인수인계 하면서 '소멸'이라는 단어 자체를 쓴 적이 없어. 사용하지 않은 연차는 15개 짜리든 11개 짜리든 무조건 수당으로 지급하는 게 맞아. 그러니, 다시 정대리한테 물어봐. 

계속 소멸된다고 말하면 분명 정과장은 수당으로 다 지급된다고 했었다고, 다시 한번 인수인계서 확인해 봐 달라고 해. 

아. 아니면, 우리 급여계산해 주는 아웃소싱 업체 있거든? 거기에 그동안 업무처리 어떻게 했었는지 한번 물어봐 달라고 해봐.

이대리 : 네, 다시 한번 확인해 달라고 얘기해 볼게요. 그런데요 과장님...

 : 응? 왜?

이대리 : 왜 제가 이런 거 하나하나 신경 써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까 근로기준법도 찾아봤어요. 예전엔 과장님이 다 알아서 해주셨는데... 그리워요!! 과장님!!

 : 해야 할 네 일도 많을 텐데... 그러게... 신경 안 쓰게 해 주면 좋으련만, 어쩌겠니... 지금은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수밖에.


 급여계산 업무를 하면서 가장 헷갈리고 복잡하다 생각했던 부분이 연차수당 산정이었다.

이전 회사엔 연차를 알아서 계산해 주는 그 어떤 프로그램도 없었다. 

오직 엑셀, 이면지, 연필 or 볼펜이 있을 뿐.

늘 이면지에다 각 년도를 적어 놓고 그 사이사이 포물선을 그리며 발생된 연차를 계산해 보곤 했는데, 그러고도 미심쩍어 아웃소싱 업체 담당자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받기도 했다.


 10년 넘게 해 온 일이라도, 늘 확인의 확인을 하던 나와 달리 나와 똑같은 성씨를 가진 이 후임자는 그야말로 대범하다.
찾아보지도 알아보지도 않고 뚝딱뚝딱 대답하고 일을 처리해 버리고, 가끔 내 이름을 팔아 모면한다.





다음 날 이대리가 다시 카톡이 왔다.


이대리 : 과장님... 소멸되는 거 맞대요. 그리고 급여계산 해주는 아웃소싱 업체엔 연차 그런 거 물어보면 안 된대요. 연차 개수 관리하는 건 자기만 할 수 있는 일이래요. 봐봐요. 이렇게 메일 답변 왔어요.


 제 인수인계자인 정 과장님에게도 여러 차례 문의하여 답변받았고, 저랑 인수인계 하는 도중에도 이대리님이 정 과장에게 문의하여 답변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의사항에 근로기준법이 우선함이 문제가 아니라 회사가 회계연도로 연차 정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인지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봐, 참 한결같이 돼먹지 않은 후임자 녀석아!
네가 언제 나한테 물었니? 그것도 여러 차례? 
그리고 너!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알기나 해?
 관련 법규 찾아보는 정성이라도 들인 거니?
너! 내 이름 좀 그만 팔아!!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쏘아붙이고 싶었다.

 물은 적도 없음서 '여러 차례' 물었다고 하고, 인수인계 도중 이대리가 나한테 연차수당 관련해서 문의한 적도 없는데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여 놓았다. 

 

 길 가다 마주치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이것 하나 물어보고 싶다.

"너 뻔히 들킬 거짓말을 어쩜 그리 얼굴표정 하나 안 바꾸고 하는 거니?
 비결이 뭐야?"



이대리 : 그런데 여기서 제일 어이없는 게 뭔지 아세요?

 : 뭔데?

이대리 : 저는 정대리에게만 보낸 메일인데, 정대린 회신할 때 팀장님을 참조로 넣었더라고요. 팀장님이 메일 내용 보시곤, 충분히 설명 들은 것 같은데 왜 자꾸 정대리 귀찮게 하냐고 한소리 하셨어요.


여우다. 상여우. 이런 여우는 보다 보다 처음 봤다.

갑자기 팀장님을 참조로 넣었다는 건 '더 이상 이 건으로 귀찮게 묻지 마라'라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울화가 치민들 퇴사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언제 그랬냐고 전화해서 따져 물을 수도 없다. 

틀린 업무처리니 다시 확인해 보라고 윽박지르라며 이대리를 몰아붙일 수도 없다. 

나는 이미 그 회사완 아무 상관없는 '퇴사자'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니 휘몰아치던 감정이 사그라들며,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걔도 참, 대단하다. 연차 소멸된다는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왜 그렇게 우기는지.

이대리 :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 관뒀어요. 퇴사할 때 주겠죠 뭐.

 : 네가 언제 퇴사할 줄 알고... 지금도 안주는 미사용 연차수당을 그때 돼서 챙겨주겠어...

이대리 : 저 그럼 영영 못 받는 건가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이대리 : 이 회사 진짜 이상해요. 이상한 사람 천지예요. 얼른 탈출해야겠어요.

 : 그래, 그 방법 밖엔 없겠다!

이대리 : 과장님, 고마워요. 그래도 과장님이라도 들어줘서 마음은 좀 풀렸어요.

 : 그것밖에 못해줘서 조금 미안하네.^^; 오늘은 칼퇴해.

이대리 : 네, 과장님.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이대리와 카톡을 끝내고 더 확실해졌다.

나는 퇴사한 사람이고, 그 회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더 이상 나에겐 해내야 하는 임무도 해낼 수 있는 권한도 없다.

울화가 치밀어도, 답답해도, 잘못된 업무처리임을 인지했어도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회사 내부 사정이다.


잘못된 업무처리로 회사가 망하든 말든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받아야 할 것을 못 받고, 누려야 할 것을 못 누릴 나의 동료들이 신경 쓰일 뿐이다.

오늘따라 권한 없는 퇴사자의 현실이 쓰게 느껴진다.

 


이전 03화 퇴사한 지 1년, 팀장님이 전화를 끊지 않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