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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 Jun 09. 2023

퇴사한 지 1년, 팀장님이 전화를 끊지 않는다.

-제가 못 이룬 정년퇴직을 팀장님은 이루시길.

 친구와의 약속을 위해 나가려던 참이었다.

 퇴사 후 하루에 한통 올까 말까 한 휴대폰이 아침부터 어색하게 울려댔다. 

 스팸이겠거니 했는데 저장된 번호의 발신자였다.

 '노무 팀장님'


 퇴사하던 날도 정말 퇴사하는 거 맞냐며, 나 혼자 어쩌라고 퇴사해 버리냐며 끝까지 나의 퇴사를 믿지 않던,

 퇴사 후 단 한 번도 연락온 적 없던 노무 팀장님이 1년이 지난 이 시점에 왜?

너무 뜬금없는 상황에 '받지 말까?'라는 찰나의 망설임도 까먹은 채 나도 모르게 받아버렸다.


 "팀장님?"

 "어~ 나야, 잘... 지내니?"

 여운 가득한 인사에 연인인 줄.


 "뭐 하고 지내?"

 "놀고먹죠."

 "논다고? 아직?"

 가타부타 나의 상황을 설명하기 싫어 짤막하게 건넨 대답에 팀장님은 놀라 했다.


 "네, 벌어놓은 돈 야금야금 까먹으며 지내고 있어요. 팀장님은 잘 지내세요?"


 "나야 뭐... 죽을 맛이지..."


 "어쩐 일로 생전 전화도 없으시다가 전화 주셨어요? 뭔 일 있어요?"


 "다른 게 아니고, 소송 공탁금 관련해서 물어볼 사람이 있어야지... 너도 그만둬버리고, 재경 팀장도 작년에 그만둬 버려서 히스토리를 아는 사람이 없잖니, 그래서 몇 개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공탁금이야 전산에 다 남아있어 지금의 재경 팀장님께 물어보쉽게 알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1년도 더 지난 퇴사자에게 묻는 건지 황당했다.

하지만 다른 부서 팀장님들에게 절대 먼저 질의나 농담 따위를  건네지 않는, 이상한 타이밍에 대쪽 같던 성격의 소유자였던 옛 기억들이 소환되며 '아, 노무 팀장님 성격엔 이럴 수 있지.' 싶었다.

 그래도 퇴사자보다는 재직자에게 묻는 게 더 편하지 않나?

 




 노무 팀장님은 원래는 생산 팀장님이었다.

 노무 업무는 인사팀 관할 업무지만, 당시 나의 팀장님은 골치 아픈 소송과 노동청 신고에 나가떨어져 버려 더 이상 노무 업무는 하고 싶지 않다사장님께 선전포고했다.

 언제는 지가 했나... 내가 했지..


 회사에 이런 사람 하나는 꼭 있지 않은가?

 누가 봐도 농땡이에, 누가 봐도 하극상인데 사장님이 찍소리도 못하는 사람, 그게 바로 인사 팀장님이었다.

 '사장님의 먼 친척인가? 사장님이 약점 잡힌 걸까?' 회사 내엔 무수한 소문만 있을 뿐 아무도 정답을 몰랐다.


결국 생산 팀장님에게 '노무 팀장'이라는 겸직이 주어졌고, 임단협 교섭 시즌만 되면 노무 팀장님과 교섭 관련 회의를 위해 생산팀 사무실에 살다시피 했다.


본인의 자리가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노무 팀장님은 매사 소극적이고 불만스러워했다. 나에게만...


"이걸 내가 왜 해야 해? 내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니? 난 모르겠어. 네가 알아서 해."


"모르시면 아시려고 노력 정도는 해 주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무도 안 하면 누가 해요?"


"넌 왜 나한테 그러니?"


"팀장님은 왜 저한테 그러세요? 그렇게 하기 싫으시면 팀장님도 사장님께 못하겠다 하세요."


속 시끄러워 노무 업무에선 손을 떼겠다는 인사 팀장을 대신해 본인에게 맡겨진 일이었기에 억울해했다.

처음엔 그 마음이 이해되어 부하 직원인 내가 오히려 노무 팀장님을 다독이며 매년 교섭 준비를 해 나갔지만, 각종 소송과 노동청 신고, 출근하지 않고 하루에 열댓 번 전화로 온갖 잡소리와 지시를 해대는 사장님의 성화 등 감정소모가 많이 되는 일들이 겹치면서 누군가를 다독일 여유가 없어졌고, 욱하는 마음에 가시 돋친 말을 노무 팀장님께 했다.


그렇게 쏘아붙이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엔 늘 '버릇없었다'라며 스스로를 자책했고, '아무리 그래도 예의는 지키자'라는 다짐을 수없이 했다.




 "공탁금은 저도 우편물 받아서 팀장님께 전해드리기만 했지, 업무 처리는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아 그래? 다 정리한 걸로 알고는 있는데... 다 정리된 거 아니니? 그런데 또 갑자기 우편물이 와서..."


 "저도 다 정리된 걸로 알고 있어요. 어차피 전산에 이력이 남아 있을 테니 지금 재경 팀장님께 한 번 여쭤보시는 건 어때요? 그래도 모르시겠으면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문의해 보세요."


 "아! 그래!! 전산에 남아 있겠네, 그래야겠다. 그러는 게 맞겠지?"


 엥? 팀장님은 아예 이 생각조차 안 해 본 건가?

 

 그나저나 이제 궁금증이 풀렸으니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전화를 끊는 것이 순서인데, 노무 팀장님은 전화 끊을 생각이 없는 듯 알맹이 없는 질문을 계속 이어갔다.


 "정말 놀고 있어?"


 "네, 제가 거짓말해서 뭐해요? 회사는 어때요? 많이들 퇴사했던데..."


 "죽을 맛이지, 나도 확 그만둬버릴까?"


 "에이~ 버티는 게 승자래요. 팀장님은 승자 되셔야죠."

 정말 버티는 게 승자일까?


 "혼자 노무 업무 보는 게 힘들다고 직원 하나 뽑아 달랬는데 사장님이 내년에 생각해 보시겠대."


 "내년? 그건 안 뽑겠다는 거 아녜요? 푸하하하"


 "네가 없으니 인사팀에선 노무 업무 아예 관심도 없고... 요청한 자료만 틱틱 주고... 원래 지들 일인데."


 "그건 너무 하네요..."


 "작년부터 지부 교섭에 참석하고 있는데 말이야~"


 '팀장님... 전화 언제 끊으실 거예요?'

 차마 꺼내지 못할 이 말을 속으로만 몇 번째 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10분이나 이런저런 회사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나와의 통화가 재미난 건지, 오랜만에 공감대 형성 가능한 사람과의 대화에 신이 나신 건지 잠깐씩 침묵이 돌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대화를 계속 이어가려 하셨다.


 "저... 팀장님, 친구 만나러 가던 길이라 이제 전화 끊어야 해요."


 "아 그래? 밖이었구나."


 "네"


 "......"


 "팀장님,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물론 그게 말처럼 쉽게 안되시겠지만..."


 "어 그래..."


 "끊.... 을게요"


 "그래, 너도 잘 지내."


 겨우겨우 노무 팀장님과의 통화를 끊내고나니 피식 웃음이 났다.

 회사에 있을 때도 속마음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어 자주 나를 불러다 놓고 하소연을 하셨는데, 아직도 여전하구나 싶었다.




 매사 너무나 소극적인 노무 팀장님 때문에 힘든 날이 많았다. 

 겸직한다고 연봉 인상도 했는데 왜 이러나 싶었다.


 사장님이 지시한 내용을 함께 들어놓고 들은 적 없다며 나에게 덤터기 씌우기도 했고, 큰 방향만 잡아주면 알아서 자료 준비를 해보겠다는 나에게 "방향 잡을 실력이 있으면 내가 여기 있겠냐?" 라며 귀만 파셨다.


 이럴 거면 왜 노무를 맡겠다 하신 건지 원망도 많이 했지만, 노동청에 불려 다니며 그간 쌓인 정이 있어서 그런지 치가 떨리게 밉지는 않았다.

 올해 초 연말정산 건으로 싹수없게 연락 온 후임자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우연히 들은 소식통에 의하면, 한 번은 사장님이 진짜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팀장 회의 중에 노무 팀장님께 "그렇게 할 거면 때려치워라. 돈 값을 못하네!"라며 핀잔을 주었다 한다.


 "사장님 정말 나보고 그만두라고 저렇게 얘기하는 거 맞지?"


 "그래도 팀장님은 그만두지 않을 거잖아요. 사직서 쓰실 거예요?"


 "정말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닐 거예요."라는 말이 듣고 싶어 팀장 회의가 끝나고 친하게 지내는 품질 팀장에게 하소연했지만, 더 비수 같은 말을 들었다 한다.


 어차피 넌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어 그만둘 용기조차 없는 쫄보 아니냐는 듯한 비아냥.

 누구나 때려치우고 싶어도 쉽게 그만둘 수 없는 그 이유.

 사장 본인도 한 가족의 가장이면서, 그걸 약점 삼아 직원들에게 상처될 아무 말이나 내뱉고 보는 못된 심성.


 그만둔 회사인데 여전히 나는 모르는 게 없구나.


 

 노무 팀장님께 느꼈던 원망도 미움도 답답함도 다 잊었다. 아니, 흐르는 시간과 함께 흘러져 사라졌다.


 진심으로 팀장님이 잘 버텨주기를 바란다.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정신 승리를 하며.


 이제는 가끔씩 들려오는 회사 소식에 심장이 두근대거나 분노가 치밀거나 화가 나지 않으니 다음에 또 전화 오면 기쁘게 노무 팀장님의 전화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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