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테스 수업을 알차게 듣고, 카페로 향했다.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슬기로운 백수의 하루를 잘 보내고 있던 오후 4시쯤이었다.
그만둔 지 10개월도 더 지났는데 후임자로부터 문자가 왔다.
순간 '왜 카톡이 아닌 문자로 연락이 오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내가 카톡을 차단했었지.
인사치레로 나의 안부를 물은 짧은 문장 뒤에 연말정산 업무 처리에 대한 문의가 구구절절 적혀있었다.
문자를 받자마자 저 깊은 곳에 담겨있던 울분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상하게 이전 회사에 대한 얘기만 들어도 화가 났다.
대답해 주기 싫었지만,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싶어 문의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고 그 뒤로 들이민 다른 업무에 대한 질문들에도 나름 잘 답변해주었다.
생소하다는 듯 물어대는 질문들 전부 이미 입에 거품 낄 정도로 몇 번이고 설명한 것들이었다.
설명해 준 대로 하지 않고 자기 스타일대로 바꿔하는 후임자에게 '그 방식으로 하면 나중에 이력 확인이 어렵다.'라고 알려주었음에도 '아 그래요?' 라며 영혼 없이 대꾸하는 그녀를 보며 그 나중에 일어날 일 또한 내 일이 아니라며 오지랖을 접었던 지난날이 생각났다.
실컷 물어놓고는 퇴근시간이 지나자 마법 풀린 신데렐라처럼 문자가 없었다.
긴박하고 긴급하고 답답해서 연락했다 해놓고 퇴근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회사일은 머릿속에서 빠져나가나 보다.
그녀는 그렇게 퇴근하면 그만인지 몰라도 나는 그 괜한 문자 한 통에 저녁 내내 우울했다.
"그걸 뭘 또 대답을 해주고 있어? 놔둬 그냥! 너 퇴사한 지 1년이나 됐는데, 연락 오는 걔가 미친 거 아냐? 아직까지 회사사람 차단 안 했어? 차단해! "
왜 또 스트레스를 만들고 있냐는 친구의 걱정 섞인 분노에 충분히 공감했고 동감한다.
차단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14년이나 몸담은 곳인데, 차단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헤어짐을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나의 20대와 30대의 청춘이 있는 첫 직장이었으니까.
그냥, 적어도 인간관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오후 2시, 또 문자가 왔다. 현장에선 인사팀이 신고서를 다 작성했다고 우긴다며 자기는 이렇게까진 못한단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게 맞는지 사진 파일과 장문의 문자를 쏟아내고 있었다.
문자를 읽는 순간 미간이 찌푸러졌다. 심장이 뛰고 짜증이 치밀었다.
'얘는 뭐지? 미친 건가?'
나는 더 이상 그 회사 소속이 아니다. 휴직자가 아닌 퇴사자다.
그리고 내가 알려준 인수인계대로 업무 처리를 하지 않아, 다른 직원들로부터 '죄송하지만 이렇게 업무처리가 되었는데 이게 맞느냐.'는 확인 문자를 몇 번이나 받아왔다.
틀린 업무처리니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라고 했지만, 나의 후임자는 내 이름을 팔아대며 선임자가 알려준 대로 업무처리 한 것이다. 난 이렇게 배웠다는 의견을 고수하며 틀린 방법으로 결국 업무처리를 했다고 한다.
라떼는, 혹여 틀리게 업무 처리가 된 건 아닌지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아웃소싱 업체 담당자에게 문의도 하고 노무사에게 답변을 받아보며 이중 삼중으로 확인하는 것이 당연한 것들이었는데, 인사 총무 업무가 처음인 이 후임자는 아무에게도 묻지 않는다. 그 단단한 심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내 이름을 팔아 틀린 방법으로 업무 처리를 해놓고,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지?'
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답을 하지 않고 휴대폰을 덮었다.
감기 기운으로 잠시 눈을 붙였는데 전화벨 울리는 진동소리에 깼다. 그 얘다. 내가 답이 없자 답답해서 전화를 한 듯했다.
-바쁘신 건 알지만, 답을 재촉해서 죄송하지만 알려주세요.
당당하다. 뻔뻔한 당당함엔 뻔뻔한 쌩깜을 선택하는 수밖에.
팀장님도 전화가 왔다. 퇴사하는 내가 오히려 불안해 중요한 업무에 대한 인수인계를 팀장님께도 하고자 했지만 끝끝내 거절하며 사장님과 골프만 치러 다녔다.
나는 분명 그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최선을 다 하지 않은 그들의 몫을 번아웃으로 퇴사를 선택한 내가 짊어질 필요는 없다.
나는, 카톡의 읽지 않은 빨간 숫자 표시가 남아 있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다.
늘 보면 바로 답을 해야 하고, 읽씹이 성격상 가장 어렵다. 성질이 급하고 빠른 결론을 도출해야 내 맘이 편하기 때문이다.